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문의문화재단지
- 공산성 선정비
- 충주박물관
- 상당산성
- 경주김씨
- 오블완
- 청풍문화재단지
- 사과과수원
- 사인암
- 법주사
- 청주박물관
- 한독의약박물관
- 보성오씨
- 국립청주박물관
- 부도
- 화양동 암각자
- 문경새재
- 효자각
- 공주박물관
- 효자문
- 화양구곡
- 각연사
- 밀양박씨
- 충북의 문화재
- 선돌
- 부여박물관
- 단지주혈
- 곡산연씨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티스토리챌린지
- Today
- Total
목록2022/12/21 (5)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name=https://blog.kakaocdn.net/dn/Lz97X/btrR3ek9FW1/tbZ1fnI9EoTkxrqXXrIY0K/img.jpg)
청풍문화재단지 비림에 있는 청풍부사를 지낸 여흥인 민영학의 선정비입니다. 승정원일기 2962책 (탈초본 136책) 고종 24년 6월 29일 을묘 53/67 기사 1887년 光緖(淸/德宗) 13년 都政。 吏批, 判書徐衡淳, 參判朴周陽進, 參議未差, 承旨缺。 以李能九爲引儀, 閔泳學爲淸風府使,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name=https://blog.kakaocdn.net/dn/pfYTd/btrTT6ThK1X/5OPKa4lxqZEzJc955zWgBK/img.jpg)
저곡리 마을회관앞에 자리하고 있는 저곡리 마을유래비입니다. 저곡리(楮谷里)는 면의 남동부에 위치하며, 인구는 150여명이다. 동은 초정리(椒井里), 서는 비중리(飛中里), 남은 비상리(飛上里) 북은 우산리(牛山里)가 접해 있다. 楮谷里(탁골,楮谷)는 본래 청주군 산외일면의 지역으로서 닥이 많이 있으므로 닥골 또는 저 곡(楮谷)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매평리(梅坪里)와 비중리(飛中里) 일 부를 병합(倂合)하여 저곡리라 해서 북일면(현 내수읍)에 편입(編入)됨. 자연마을 골닥골 : 저곡리(楮谷里)에서 으뜸되는 마을. 개화대들 : 꽃이 많이 피는 들. 저곡리 북서쪽에 있는 비중리와 우산 1구 사이에 있는 넓은 들. 마산바위 : 말처럼 생긴 바위. 일명 말코 바위라 하며 베틀의 일부분의..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name=https://blog.kakaocdn.net/dn/2z48H/btrTQ0UmII3/z5wevSI2d6kWlH7hZlgZ41/img.jpg)
저곡리楮谷里(탁골,楮谷,골닥골)는 본래 청주군 산외일면의 지역으로서 닥이 많이 있으므로 닥골 또는 저곡(楮谷)이라 하였는데, 1914年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매평리(梅坪里)와 비중리(飛中里) 일부를 병합(倂合)하여 저곡리라 해서 북일면(현 내수읍)에 편입(編入)되였습니다. 청주시 내수읍 저곡리에 1990년에 세운 북암 이병수(北庵 李炳洙)의 사적비(事蹟碑)로서 비문은 성균관장 김경수(金敬洙)가 짓고 글씨는 평양(平壤) 조병호(趙柄鎬)가 썼다. 비석의 전면에는 북암전주이공사적비(北庵全州李公事蹟碑)라고 각인되어 있으며 옆에는 효자 이주업의 기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저곡리는 전주이씨의 집성촌입니다. 이병수(李炳洙 1883~1959)는 전주인으로서 자는 기화(奇化)요 호는 북암(北庵)이다. 선고(先考) 종원(..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name=https://blog.kakaocdn.net/dn/yMYQ0/btrTT6yYH9V/1Ur8OUeLj6wXNecYkLvOu0/img.jpg)
조선 정조 11년(1787) 청주목 산외일면 비홍리(지금의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상리 비홍마을)에 세워졌다. 도암(道巖) 변익하(卞益夏, 1683∼1717)는 부모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손가락을 잘라( 斷指注血)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으며, 시묘살이 중 음식을 거르며 슬퍼하다가 서른다섯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한다. 지금의 효자각은 1968년 중건한 것이며 정면 1칸·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에 낮은 벽을 쌓은 뒤 홍살로 막고 안에 편액을 걸었다. 초계변씨(草溪卞氏) 문중에서 관리한다. [卞益夏孝子閣]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효자처사변익하지문(孝子處士卞益夏之門)이라고 각자된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name=https://blog.kakaocdn.net/dn/tUElJ/btrTXMUcIOf/CJXx5innPfkbkPHfecfeaK/img.jpg)
내수읍 저곡리로 접어들며 동네초입에 있는 효자 이주업의 기적비입니다. 저곡리는 완산이씨들의 집성촌입니다. 이주업(1909~1970)은 완산인으로 호는 효당이며 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새로 의성김씨를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가 우연히 병을 얻자 이주업은 아내와 함께 밤낮으로 시탕하며 효성을 다하였다. 특히 이주업은 단지하여 흐르는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주어 (단지주혈)어머니의 수명을 수개월 더 연장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극한 효성에도 어머니가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초종범절의 예의를 갖추어 행하는 한편 시묘살이 3년을 옛사람과 같이 하였다. 그 후 아버지 또한 노환으로 고생을 하자 아내와 함께 정성을 다하여 병구완을 해드렸다. 그러나 아버지 또한 세상을 떠나니 3년 시묘생활을 어머니때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