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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수리조합 회장을 지낸 주석균의 불망비입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단기 4281년(1948년)입니다. 주석균은 해방 이후 농림부차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관료.1903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신안(新安)이며, 호는 남정(南庭), 아버지는 형규(炯奎)이다. 1919년 평안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23년 4월 조선총독부 행정강습소에 입소해 1924년 3월 수료했다. 졸업 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과 속(屬 )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933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평안북도 위원군수와 선천군수를 역임했다. 특히, 위원군수로 재직할 때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적극 실시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조선수리조합연합회 부회장으로 일했고,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농..
천인봉은 일제 강점기 제천 출신의 자선가. 본관은 영양(潁陽). 자는 우현(禹玄), 호는 석거(石居). 선조는 명나라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이여송 휘하로 조선에 출정하여 여러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도 전공을 세우고 귀화한 천만리(千萬里)이다. 천인봉(千仁鳳)은 청풍문화재단지에 세워진 자선비에 의하면 관직은 의관(議官)이었다. 의관은 1895년(고종 32) 중추원의 관제에 따라 설치된 직위로 의장·부의장 밑에 속하며 1·2·3등으로 나뉘고 인원은 50명 안팎이었다. 천인봉은 평소에 효행이 인근에 자자하였으며, 어려서는 매우 가난하였지만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1939년 청풍 지역에 심한 흉년이 들어 가난한 사람들이 먹지 못하여 굶어 죽게 되자, 돈 8,000냥과..
청풍문화재단지 비림에 있는 청풍군수를 지낸 송영구의 선정비입니다. 조선 후기 청풍 군수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인수(仁叟), 호는 표옹(瓢翁)·모귀(暮歸)·일표(一瓢)·백련거사(白蓮居士). 아버지는 송령(宋翎)이며, 어머니는 진주 하씨(晉州河氏) 하세준(河世濬)의 딸이다. 부인은 해평 윤씨(海平尹氏) 윤승경(尹承慶)의 딸이며,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에 재종형의 아들인 송흥시(宋興詩)를 양자로 들였다. [활동 사항] 송영구(宋英耈)[1556~1620]는 1576년(선조 9)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84년(선조 17) 서총대(瑞蔥臺)[창덕궁 후원에 쌓았던 석대(石臺)와 정자] 정시(庭試)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승정원 주서가 되었으나 낙향하였다. 1592..
장정현효자비(張井鉉孝慈碑)는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굶주릴 때 경암 장정현(敬菴 張井鉉)이 사재를 털어 굶주린 주민을 도와서 이에 감격한 주민들이 세운 비이다. 이 비는 1950년 2월에 세운비(비신 90×39×15㎝)로 청풍문화재단지에 있다.
조선 후기 청풍 부사를 지낸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할아버지는 김상헌(金尙憲)이며, 아버지는 제천 현감과 청풍 군수를 역임한 김광찬(金光燦)이다. 김수항(金壽恒)이 동생이다. 김수증(金壽增)[1624~1701]은 1650년(효종 1)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여 1652년(효종 3)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그 뒤 각사(各司)의 정(正)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석성 현감과 평강 현감을 지냈다. 1670년(현종 11) 곡운(谷雲)[현 강원도 화천군 화북면 영당동]에 복거(卜居)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가 1675년(숙종 1) 성천 부사로 있던 중 동생 김수항이 유배되자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그 뒤 회양 부사와 청풍 부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