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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835)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세계화와 디지털 시대의 쾌속 질주 속에서 “시는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2004)라는 산문에서 신경림은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1956년에 ‘갈대’로 등단해 60년간 활동해온 현역 시인이 21세기를 맞으며 실감한 것은 시의 ‘무능’이었다. 이제 시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며, 인간과 삶의 실상을 보편적인 언어로 노래할 수 없다. 적어도, 시가 이렇게 무능해졌다는 소문이 번지고 있다. 신경림은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에 걸쳐 자신이 시를 통해 해온 일들이 별안간 부정되는 사태에 당혹한다..
충주시 앙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입니다. 석뷸입상까지 쇄석을 이용해 도로룰 만들어 놓았다.나름대로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흔적이 남아있다.강천리 석조여래입상이라는 간판이 서있다. 몇번이고 발길을 한 곳이지만 갈때마다 새로움은 어린 내 마음탓인가? 충주 강천리 석불입상은 불신이 네모난 평판석에 가까우며 옷주름의 조각이 소략한 상이다. 머리는 소발이며 오른쪽이 훼손되었으나 낮은 육계가 보인다. 미간에는 백호가 표현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얼굴은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둥근 눈과 작은 코를 볼 수 있다. 귀는 짧게 표현하였고 목은 시멘트로 보강하였다. 목에는 떨어진 불두를 보강하면서 철심을 박았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은 많은데 석불입상은 변한게 없다며 한탄하시던 동네 할머..
주덕읍 화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풍산김씨 충주파 중시조인 김호의 재실이다.원래의 용도는 풍산김씨문중의 강당으로 문중교육시설이였으나 지금은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지명도 강당에서 유래하여 강당길로 불리우고 있다. 풍산김씨 유래와 충주 입향조인 시조(始祖) 김문적(金文迪)은 안동부의 풍산현 사람으로 고려조에 벼슬이 판상사(判相事)로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게 되었다. 풍산김씨 충주파 시조의 휘(諱)는 호(鎬)이며 관은 내직 통훈봉상시정이며 외직은 군수이다. 그는 시조(始祖) 문적의 13세손이다 그의 名祖는 6대조 고려 봉익대부 삼사 좌윤 휘 안정(安鼎)이고 그의 아드님 휘 자량(子良)인데 고려조의 시중이고 조선조에서 5조의 판서를 역임한..
맹골마을은 매화자리가 변하여서 맹골이 되었다가 한자 표기로 옮기면서 오늘날의 맹동 마을이 됐다 한다. 대곡리 맹동 마을에 효부이씨의 정려문이 있다. 효부 이씨부인은 정수동의 아내로 효성이 지극하여 타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시아버지가 학질에 걸려 삼년간이나 앓자..
소태면 오량리 별묘마을 입구에 있는 석장승입니다. 원래 이곳은 서낭당 자리였으나 도로가 나면서 서낭당이 철거되였습니다. 그 후 동네에 좋치않은 변고가 일어나면서 나무로 깍아 세우던 장승을 돌로 깍아 세우고 매년 동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서낭당 신을 모시는 당집은 석장승에서..
리정지(李廷芝 : 1606~1691) : 리덕량의 큰 아들로 경제적인 부를 이룬 분이다.그리고 자식을 6명이나 두었으며, 그 중 넷째 아들인 진열이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명예까지 이룩하여 방호파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리정지의 자는 성서(聖瑞)이며 “산골 방촌에 난 후덕한 장자(長者)였다” 옛날에는 부자를 장자라고 했으므로 이를 통해서도 리정지의 경제적인 능력을 알수가 있다. 그는 부의 축적뿐 아니라 분배에도 신경을 쓴 분으로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들을 위해 구휼활동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들인 진열 덕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증직받았다 리정지 비의 공식 명칭은 ‘증 호조참판 이공 묘갈명’(篆書)이다.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리공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