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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연정리 출신 효자 한양인 조병천의 여막생활과 함께 흐려져 가는 효의 근본을 깨우치게하는 시설물입니다. 생전의 조병천의 모습과 함께 유물등을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지금의 시대에서는 먼 옛날 이야기 같은 여막생활이 현실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느낌으로 가슴을 울릴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문의문화재단지 양반가옥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문기사들과 함께 효자 조병천의 생전의 모습을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여막이라 함은 상주가 궤연(几筵: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하여 차려놓은 영좌)이나 무덤을 지키기 위하여 그 옆에 지어놓고 거처하는 초가를 칭합니다. 상주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키는 일을 여묘(廬墓)라고 한다. 여막을 지어 여묘하는 풍속은 중국의 장제에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쌍청리 석불입상은 현재 머리가 결실된 상태인데,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체는 굴곡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왜소한 느낌을 준다. 법의는 통견으로 굵은 옷주름을 이루며 양 팔을 지나 발목까지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수인을 보면 왼손은 법의의 한쪽자락을 걸친 채 복부에서 손목을 꺾어 올려 엄지와 검지만을 펴서 가슴에 내장하였으며,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내장한 상태에서 새끼손가락만을 펴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현재 높이 73㎝이다. 문의문화재단지 유물전시관 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의문화재 단지내의 비석들은 대청호의 조성으로 문의면의 많은 지역이 수몰될때 그 지역에 산재되어 있던 이 곳 문의를 스쳐간 고을수령등 관리들의 선정비등을 이 곳에 모아 비석거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묘가 있는 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일명 장군석이라고 불리우는 석상입니다. 혹자들은 강감찬장군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이야기도 합니다. 강감찬 장군묘소 옆에 사당인 충현사를 지을때 발견된 것이라고 합니다.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묘소(玉山面 國仕里 姜邯贊將軍墓所) (tistory.com)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장군묘소(玉山面 國仕里 姜邯贊將軍墓所) 국사리에는 예전부터 유명한 장군의 묘가 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금주(衿州) 강씨 후손들은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king6113.tistory.com 옥산면 국사리 충현사(玉山面 國仕里 忠顯祠) (tistory.com) 옥산면 국사리 충현사(玉山面 ..
문의문화재단지 입구쪽에 자리하고 있는 기자석입니다. 기자석은 대부분 다산의 기능을 겸하고 있으며 남성의 성기모양을 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들낳기를 바라는 민초들의 기도처입니다. 남자의 생식기를 인위적으로 조각하여 세우거나 비슷한 형태의 자연암석을 대상으로 하여 기자(祈子)나 풍년·풍어·자손만복 등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악신(惡神)으로부터 자신과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 민족고유신앙인 남근숭배의 직접적인 신앙물이다. 남근숭배신앙은 인류의 선사시대부터 남자의 성기가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신비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원초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어, 자손번성이나 종족보존, 그리고 풍부한 생산력의 기원, 제재초복(除災招福)을 위하여 숭배되고 신앙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근석이라 할 때 그 형태는 대개 선돌[立石..
청우김옹삼십주년종수한혈비( 靑友金翁三十周年種樹汗血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내용으로 보아 민둥산이었던 산에 조림을 함으로서 산림녹화에 힘을 쓰고 임산물의 수확등으로 마을의 경제적인 부를 이룬 청우선생을 기리기위한 비석으로 추측됩니다. 비석은 문의문화재단지 노현리고가 옆에 서있습니다. 회명김선생지생육비( 晦明金先生之生育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비석의 내용으로 보아 회명이라는 호를 쓰는 김선생이 낳고 자란곳을 표시하기 위한 비석으로 추측됩니다. 비석은 대청댐이 생기면서 수몰지역 곳곳에 산재되어 있던 비석을 모아 이 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청우김옹이모호천보목익경지허( 靑友金翁離母號天補木謚頸之墟)라고 자연석에 비석모양을 음각하여 각자하여 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