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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낭랑한 목탁소리가 낙가산에 울려퍼진다.수능일에 맞춰 기도하는 신도들과 스님의 염불소리가 보살사 경내를 낮게 흐른다. 용암동 낙가산 보살사(龍岩洞 洛迦山 菩薩寺) 용암동 낙가산 보살사(龍岩洞 洛迦山 菩薩寺)동부우회도로를 달리다 보면 요즈음 한창 입주가 시작된 동남지구 아파트 단지가 있습니다 보살사라는 입간판을 보고 달리다 보면 낙가산 밑에 보살사에 이르게 됩니다 보살사가 위치한 낙가king6113.tistory.com 부슬거리며 내리는 가는 빗줄기가 어깨위로 내려 앉는다.그동안 발견되어 보살사 한쪽에 있던 보살사중수비가 제 자리를 찾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살사를 찾았습니다.비록비두의 한쪽과 비신이 동강이 나있지만 나름 위엄있는 중수비의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용암동 보살사 보살사중수비(龍巖洞 菩薩寺..
미원면 약물내기 공원 비석군에 있는 해주인 오윤환의 송덕비입니다.수산오윤환선생송덕비( 壽山吳允煥先生頌德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석의 좌,우 후면에는 수산선생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번에 약물내기 공원이 새로 단장을 하며 추가로 제작된 비석입니다. 비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공을 나는 백학처럼 오직 청렴과 정직을 삶의 신조로 삼고 한평생 고고하게 살다가신 마지막 조선선비가 있으니 그는 수산 오윤환 선생님이시다.선생은 해주오씨 시조 오인유공의 26세손이요 증시조 진천현감 오윤성공의 12세 손으로 1929년 1월 13일 청주시 미원면 수산리에서 오형근공과 민남산여사 사이에서 4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부인 노병일 여사 사이에서 2남 3녀를 두었다.선생은 어려서 부터 문재(文才)가 탁월하여 ..
비석의 내용을 살펴보면충은 나라의 표준이요.효는 모든행동의 근본이다.조약손(祖若孫)두분은 충효를 겸전하고 손부 또한 효성지극하여 이에 감동한 임금님은 각기 증직과 아울러 정려의 전을 내렸으니 바로 남양홍씨충효각이다.만계 홍석무선생(1611~1667)은 세살때 아버님을 여의고 아홉살때 모부인 병환에 필요한 생선을 구하러 금강탁류를 바라보며 굽어보며 울고 있으니 갑자기 큰 물고기가 튀여올라오는 이적이 일어났다. 이는 실로 지성이 감천하여 생기는 일이더라.십칠세 모부인 장례에는 피눈물로 초종의 예를 다했고 삼십세에 청하현감으로 부임할제 백씨(伯氏)앞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제 비록 차자이나 부모님 신주라도 모시게 해주시면 궁천의 한을 만의 하나라도 풀까 하옵니다. 이에 동감한 백씨 또한 눈물로 이를 허했다.동헌뒤..
미원면 미원리 약물내기공원에 자리한 홍석무의 사적비입니다. 홍석무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만계(晩溪), 본관은 남양이다. 회덕 신탄진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조부 홍순각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부친 홍이정은 참봉을 지냈다. 홍석무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출중하였고, 특히 효성이 지극했다. 17세 때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묘 곁에 묘막을 짓고 형과 함께 시묘했는데, 벽도 바르지 않고 상복도 벗지 않고, 죽으로 3년을 연명하여 슬픔을 다하였다. 또한 복을 벗은 후에는 3세 때의 부친상에 거상을 하지 못한 것이 죄가 되어 선친을 위해 3년 상을 추상하고자 하였으나 조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하여 일생 동안 사치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는 항상 짚으..
청파선생의 사적비는 미원시내 약물내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공은 1919년 12눨 23일생으로 이 고장에서 출생하였다.지역발전을 위하여 일제강점기에는 법원의 지방행정주사로 그 후에는 엽연초생산조합에서 일을 하였습니다.미원면 노인회장등 을 역임하였으며 그 후 창주향교 전교를 역임하는 등 지역발전과 더불어 지역의 유림활동에 지대한 공로가 있어 지역주민과 유림들의 뜻을 모아 비석을 세웠습니다.문중을 위해서는 자신의 토지 300여평을 희사하는 등 남양홍문의 사당인 남양사를 창건하는데 진심진력을 다하였다.숭조와 이웃주민들의 어려움을 위하여 전심을 다한 청파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비석입니다. 원임성균관전학청주향교전교청파남양홍공구표사적비( 原任成均館典學淸州鄕校典校靑坡南陽洪公龜杓事績碑)라고 적혀있습니다.
미원면 미원리에 있는 이 충효각은 1801년(순조 1)에 충효로 지평(持平)에 증직된 만은(晩隱) 홍주화(洪冑華)의 충효각에 1806년(순조 6)에 충효로 참판(參判)에 증 직된 그의 할아버지 만계(晩溪) 홍석무(洪錫武)와 1819년(순조 17)에 효부로 명정 된 그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 등 3인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이다. 지 금의 충효각은 1967년에 중수하고 1986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3인의 충효문 편액을 걸었다. 정려 안에는 1967년에 판각한 중수기(重修記)가 걸려 있으며, 앞에 1986년에 세운 사적비와 중수비가 있다. 홍석무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만계(晩溪), 본관은 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