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부여박물관
- 충북의 문화재
- 청풍문화재단지
- 곡산연씨
- 오블완
- 티스토리챌린지
- 효자각
- 선돌
- 각연사
- 한독의약박물관
- 공산성 선정비
- 단지주혈
- 효자문
- 상당산성
- 사과과수원
- 밀양박씨
- 화양동 암각자
- 보성오씨
- 화양구곡
- 국립청주박물관
- 경주김씨
- 공주박물관
- 부도
- 문의문화재단지
- 법주사
- 사인암
- 충주박물관
- 문경새재
- 청주박물관
- Today
- Total
목록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95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의문화재단지내 비석군에 자리하고 있는 문의현령을 지낸 사람의 불망비입니다. 후대에 사람들에 의하여 이름이 훼손되었습니다. 현령 * 후 ** 영세불망비( 縣令 * 侯 * * 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으며 비석의 건립시기는 자세하지 않치만 무술년(戊戌年)으로 추정이 됩니다. 무술년전후로 문의현령을 조사해보아도 아구가 많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석건립년도도 다시 한번 현장에서 잘 확인해봐야 겠습니다.
문의문화재 단지 공적비군에 자리하고 있는 문의현령을 지낸 황기협의 선정비입니다. 비석에는 현령황후기협선정비(縣令黃侯基協善政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석의 건립시기는 도광8년 (1828년)입니다. 특이하게도 이비석에는 善자의 속자를 적어놓았다. 승정원일기 2217책 (탈초본 112책) 순조 27년 5월 22일 정유 18/24 기사 1827년 道光(淸/宣宗) 7년朴綺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以朴綺壽爲吏曹參判, 黃基協爲文義縣令, 吳泰重爲昌寧縣監, 贈吏參柳宗春贈吏判例兼, 工曹判書柳相祚考。
문의문화재 단지내 공적비군에 있는 청주판관을 지낸 서기보의 불망비입니다. 서기보는 판관에서 문의현령으로 자리를 이동한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판관서후기보청간애민선정비(判官徐綺輔靑澗愛民善政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승정원일기 2977책 (탈초본 136책) 고종 25년 9월 7일 을묘 23/31 기사 1888년 光緖(淸/德宗) 14년○ 有政。 吏批, 判書趙秉世牌招不進, 參判趙榮夏牌招不進, 參議李鎬喆進, 同副承旨李鎬冕進。 以吏批言啓曰, 判書趙秉世, 參判趙榮夏, 竝牌招不進, 小臣獨政未安, 何以爲之? 敢稟。 傳曰, 只出緊任。 又以吏批言啓曰, 侍從臣父年七十人, 每於歲首, 抄啓加資, 而新有應推恩人, 雖非歲首抄啓, 亦爲加資事, 載在法典矣。 今日政侍從臣父年七十以上, 別單書入之意, ..
문의문화재단지 공적비군에 자리하고 있는 청송인 심상훈의 영세불망비입니다. 비석에는 관찰사심공상훈영세불망비(觀察使沈公相薰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정해년(丁亥年,1887년) 10월입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승정원일기 2937책 (탈초본 135책) 고종 22년 6월 16일 계미 2/18 기사 1885년 光緖(淸/德宗) 11년○ 鄭光淵啓曰, 卽伏見諸道今春夏等褒貶啓本, 則京畿監司朴齊寬, 江原監司閔致序, 忠淸監司沈相薰, 黃海監司尹宇善, 咸鏡監司鄭基會, 守令無一人居中居下。 심상훈은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순가(舜歌). 1882년(고종 19) 수구당의 한 사람으로 임오군란 때 장호원(長湖院)에 은거하고 있던 민비에게 대원군의 납치소식을 비롯, 왕궁의 근황과 청·일 양국의 출병사실 등 ..
문의문화재단지 비석군에 자리하고 있는 여흥인 민응식의 불망비입니다.비의 전면에는 삼도통어사민공응식영세불망비(三道統禦使閔公應植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승정원일기 2976책 (탈초본 136책) 고종 25년 8월 18일 〈정유〉 8/37 기사 1888년 光緖(淸/德宗) 14년 ○ 傳于李完用曰, 戶曹判書閔應植統禦使除授。통어사에 제수되었습니다. 민응식은 개항기 이조판서, 예조판서, 강화부유수 등을 역임한 척신입니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문(性文), 호는 우당(藕堂). 민영우(閔泳愚)의 아들로, 민한준(閔漢俊)에게 입양되었다.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장호원(長湖院)의 집을 명성황후의 피신처로 제공하여 출세의 ..
조득림은 조선후기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덕경(德卿). 조제만(趙濟晩)의 아들이다. 1831년(순조 31) 진사로서 식년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837년(헌종 3) 부교리를 지냈다. 그 뒤 영변부사를 거쳐 1846년 평안도암행어사 박영보(朴永甫)의 서계에 의하여 부사로서의 실정이 인정되어 치죄되었다. 1848년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853년(철종 4)에는 호군으로 종묘친제시(宗廟親祭時) 독옥책관(讀玉冊官)이 되었다. 1855년 형조판서·대호군이 되었고, 동지사의 정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왔다. 이듬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내고 대호군으로서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에 임명되었다. 1858년 판의금부사가 된 이후 고종대까지 걸쳐 여러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