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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박춘무 (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몽단이고개에 의마총을 보고 의마총이 자리한 산의 능선을 타고 오르면 박동명장군의 무덤을 볼수가 있습니다.의마총에서 걸어서 오르면 바로 만날수 있습니다.비석과 함께 문인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동명장군의 무덤은 시신이 없고 옷을 묻어 묘지를 만든 무덤입니다.박동명의 무덤과 의마총이 위치한 고개를 접지고개라고 합니다. 접지고개는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 고개입니다. 이 곳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박동명(朴東命)의 혼이 고개를 넘다 갑자기 사라졌을 때 박동명은 강서면 항각골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아들 홍원에게 현몽하여, “내가 고개를 넘지 못하고 구천으로 올라갔으니 내 옷을 거두어 고개에 무덤을 마련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홍원은 솔가하여 장남령을 향해 떠났고, 이 때 휘하장수 김득성은 장군의..
9월이지만 한 낮으론 날씨가 아직도 더운기운이 가득하다. 부모산에 자리한 연화사를 오르는 길은 그래도 나름 녹음으로 인하여 더운기운이 덜하다 조용한 연화사를 찾는 나의 발길이 가볍다. 오르는 길 양옆으론 철 지난 연등들이 바람결에 그네를 탄다. 현재의 연화사는 1928년 금강산 ..
아침 저녁으로 선들거리는 날씨가 한 낮으론 아직도 그 위세가 좋다.연화사에 차를 세우고 모유정으로 오르는 짧은길이 경사도가 있어서 그런지 제법 땀이 흐른다.신발이라도 챙겨신었으면 좋으련만 점심시간에 짬내어 찾았으니 구두를 신고 오르는 길이 조금은 서툴다.지자체에서 부모산을 중심으로 둘레길을 조성하여 한 낮인데도 제법 산행을 즐기시는 분들이 많다. 모유정(母乳井)은 문헌에 기재된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래 부모산은 아양산, 악양산(岳陽山) 등으로 불렸다. 임진왜란 때 박춘무(朴春茂)[1544~1611]가 복대동 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 마저 탈환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박춘무에게 패전했던 왜병이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산 주위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자 ..
남이면 구암리에 위치하고 있는 민양공 화천당 창의사 박춘무선생의 묘소이다.남이면 구암리에서 청주로 들어오는 길가에 작은 팻말이 보인다. 박춘무는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사육신 박팽년의 아우 인년(引年)의 8세 손이었던 기정(箕精)의 넷째 아들이다.그는 '토정비결'이라는 책을 지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에게서 배웠다.청주 읍성 탈환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진 옥천의 조헌(趙憲)도 박춘무와 함께 이지함에게서 배운 문인(門人)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화천당(花遷堂). 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조헌(趙憲)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 데 큰 활약을 하였다.침구술(鍼灸術)이 뛰어나 의관(醫官)으로도 활약하였으며, 뒤에는 지방관으로 1597..
청주에서의 의병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 박춘무이다.청주의 이곳 저곳에는 박춘무와 그의 아들 박동명 등을 기리기 위한 많은 유적들이 있다.삼대창의사적비와 함께 원모단 그리고 민충사와 박동명 충신각등이 있다.구암리 박춘무의 묘로 들어가기전에 야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박춘무의 신도비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침입한 왜적은 거침없는 파죽지세로 밀어닥쳐 보름만에 청산, 황간을 불태우고, 5월 2일에는 보은, 회인, 청주, 진천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적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일본군의 일부를 청주성에 주둔시켜서 충청도 지역을 장악하게 했다. 그래서 청주읍성이 함락된 후 3개월은 우리 관군의 통제권은 상실된 상태였다.청주성 탈환작전은 7월 하순 시작되었다. 청주의 관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