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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문화재 (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맷돌은 여러 사람이 돌리거나 연자방아처럼 말의 힘을 빌려 돌릴 만큼 큰 것도 있지만, 약맷돌은 대체로 작은 편입니다. 또한, 불로초나 거북과 같이 건강과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을 조각한 것이 많습니다. 이 약맷돌은 거북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윗짝으로 사용했으며, 연잎 모양의 밑짝은 가장자리에 홈을 파 약재 가루가 모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거북형약맷돌
강릉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강릉부사를 지낸 이호석의 불망비;입니다.,부사이공호석영세불망비(府使李公鎬奭永世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비석의 규격은 높이 122 너비 45 두께 11.2센티이며 재질은 화강암입니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1887년 안변부사를 지내던 이호석과 강릉부사 조동만을 서로 자리를 바뀌어 근무토록하였다. 이호석은 1885년(고종 22) 문과에 급제한 뒤 사악(賜樂)하였으며, 승정원동부승지와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1898년 겸장례(兼掌禮)를 지냈으며, 1904년 궁내부특진관과 봉상사제조를 역임하였다. 1905년 영희전제조(永禧殿提調)를 지냈다. 승정원일기 2961책 (탈초본 136책) 고종 24년 5월 4일 경신 13/24 기사 1887년 光緖(淸/德宗) 13년 ○ 吏曹啓曰, ..
1920년인 경신년(庚申年) 6월 일제강점기시절 내동면장을 지낸 정봉욱의 구휼불망비입니다. 비석의 위치는 원래 평거면 신안리에 있던것을 진주성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내동면장정공봉욱구휼불망비(奈洞面長鄭公奉郁救恤不忘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윤령(尹聆, 1543~1593)은 조선시대 효자이다. 본관 파평. 자 언성(彦聲), 호 모암(慕庵). 청원군 북이면 내추리출신. 파평부원군 좌익공신 공간공(恭簡公) 윤형(尹炯)의 현손으로 부친은 충좌위 부사관 사화(思和), 어머니는 행주 기씨(幸州奇氏)이다. 8세 때에 부친과 백씨의 상을 함께 당하여 3년간 묘막살이를 하였다. 15세 때 또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향하며 하늘에 축원하기를, “이 몸이 대신 죽어서라도 어머님의 병환만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해 8월에 별세하니 선산 내추리에 합장하였다. 공이 다시 시묘를 살 때 그 효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어디선가 까치와 까마귀 한 쌍이 묘 앞 나무에 날아들어 수시로 울고 그치기를 계속하다가 3년이 되어 날아가..
후미리사지에는 그리고 석탑 이외에 두부가 결손된 석조여래입상이 있었으나 1978년경에 없어졌다고 하며 초석과 문확석 등이 있다고 한다. 마을 주민(노명식, 67세)의 전언에 의하면 석불은 과수원(후미리 1614-10번지) 한가운데 서 있었으며, 발부분은 묻혀 있었고, 지상에노출된 전체 높이는 1.5m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불상이 큰 돌에 붙어있었다고 표현된 것으로 보아 바위에 양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불은 1970년대 후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을 무렵 새마을 지도자들이 천렵을 왔다가 경운기에 싣고 갔다고 하며 주민들이 찾으려했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사지에서 발췌] 한국의 사지의 글에서 새마을지도자들이 천렵을 왔다가 후미리사지에서 불상을 싣고갔다는 대목과 불상이 큰돌에 붙..
노은면 수룡1리에서 신효리쪽으로 길을 가다 오른쪽 너른논을 바라보면 논둑에 커다란 비석이 1기 보인다.이 선정비는 원래 현재 이 곳이 경지정리 되기전서 부터 이 곳에 있었다고 한다.경지정리가 되기전에도 논둑길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선정비등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곳에 세우는 것이 일상인것으로 보면 이 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길인것으로 추정된다.비석이 있는 노은은 그 명칭의 발단은 이러하다.1630년경 영조 때에 청안현감을 지낸 정경연(鄭慶演)[1604~1666]이 산림이 우거진 이 땅에 들어와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 채 노모를 봉양하며 은거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정경연이 살던 곳을 노은고개[老隱峴], 또는 논고개[老峴]라 불렀는데, 이것이 유래가 되어 면의 이름도 노은현면(老隱峴面) 또는 노은면(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