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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조천리 석보군사우(淸安面 釣川里 石保君祠宇)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안면 조천리 석보군사우(淸安面 釣川里 石保君祠宇)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4. 11. 20:19

 

석보군묘각은 조선 정종(定宗)의 9남인 석보군(石保君) 이복생(李福生)과 부인 원주김씨, 석보군의 장남 양위의 위패(位牌)를 모신 부조묘(不蔿廟)로 1905년 창건하였다. 초창 당시에는 초옥이었으나 1930년 기와지붕으로 재건되었으며, 1986년 중수하였다.

석보군묘각이라는 알림판이 있는 반면에 부조묘에는 석보군사우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지난 사진을 보니 석보군묘각이라고 쓴 조잡한 현판이 보인다. 석보군묘각현판을 떼어내고 석보군사우라는 간판을 새로 걸은 듯 하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 16호로 지정 관리되고있다.

 

석보군은 생졸년 미상.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복생호는 검묵당(儉默堂)이다.
정종(定宗)의 9남으로 모친은 숙의해평윤씨(淑儀海平尹氏)이다. 처음에 명선대부 정(正)에 올랐다가 석보군영종정경부사로 추봉되었다.
본성이 청렴검소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며 학문에 통달하여 ‘대문장가’라 일컬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서 늘 산간에 은거하고 세상 일에 관여치 않았다.
평소에 검묵(儉默)을 생활신조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검묵공자’라고 일컬었다. 이로 인하여 ‘검묵’을 당호로 삼았다.
배위는 원주김씨(原州金氏)
판중추부사 대경공(戴敬公) 김연지(金連枝)의 딸이고 학성군부인(鶴城郡夫人)이다.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묘소는 충주시 소태면 양촌리에 있다.

 

 

 

 

 

건물은 홍살문, 삼문, 부조묘로 되어 있다. 부조묘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평면구성은 전면(前面)에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내부는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설치하였다. 기단(基壇)은 장대기단(長臺基壇)으로 정평주초를 설치하고 전면은 원기둥, 후면은 각주로 하였다. 공포형식은 이익공으로 하였으며 가구형식(架構形式)은 1고주(高柱) 5량가(樑架)로 하였다. 부조묘의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하였으며 좌향은 서북향이다.

 

 

 

 

 

석보군 묘각은 청안면 조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조천리로 접어들어 조천3리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눈에 잘 띤다.

승용차로 진입할수는 있지만 좁고 가파르다 석보군묘각밑에 주차할수는 있어도 장소가 협소하니 큰길가에 치를 두고 걷는것이 편하다.

길에서 약 100여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니 그리 힘이 들지는 않다

 

석보군 묘각에서 바라본 조천리의 모습이다.

조천리는 본래 청안군 읍내면의 지역인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폐합(廢合)에 따라 봉성리(鳳城里), 봉암리(鳳岩里), 송암리(松岩里), 욕동(浴洞), 조강리(釣江里), 덕암리(德岩里), 월암리(月岩里), 청당리(請唐里), 연천리(燕川里), 청하리(淸荷里), 정자리(程子里) 일부(一部)를 병합(倂合)하여 조강(釣江)과 연천(燕川)의 이름을 따서 조천리(釣川里)라 해서 청안면(靑安面)에 편입(編入)되었다. 한강과 금가의 분수인 월현과 송티를 배경으로 하여 구릉지에 산재하여 있는 마을이며 고대지명으로 금강 상리, 유기촌, 욕동, 송티 , 연천등 12개 부락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廢合)으로 청안면(靑安面) 조천리(釣川里)로 편성되어 오다가 광복후에 4개구로 분구하여 행정을 하여 오던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근년 중수시 부조묘 측면의 중방하 및 묘각 후면의 하방하에 설치된 현대식 붉은 벽돌을 철거하고 전통기법으로 재현하였다. 또한 장마루는 철거하고 한식 우물마루로 하였다. 보의 치목기법에서 고식을 남기고 있으며, 벽체 및 마루에서는 원형에 가깝게 재복원되었다.

 

주위는 깨끗히 잘 정리정돈 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