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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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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사지 한가운데 있는 고려 전기 석탑입니다. 현재 원평리 사지에는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과 석탑 등이 남아 있다. 이 사찰은 신라 선덕왕 때 창건되어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이나 유적·유물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또한 이 일대에는 법흥왕 때 선조사(宣朝寺)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하나 후대에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조성된 석불과 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사찰이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은 석불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독특한 문양과 조각 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는 석탑이다. 한편 원평리 사지 주변에는 충주 숭선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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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부처님 모자는 쓰셨어도 더워보이시네. 큰 바람도 필요치 않아. 작은 나뭇가지 일렁이는 작은 바람이라도 불었으면 좋겠다 부처님 찾아드는 내 발길도 조금은 시원하게 말이다. 용담사 부처님 뒷모습이 쓸쓸하다. 20210730신니면문숭리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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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리에서 원평리미륵을 보고 용원저수지 둑아래부근에 위치한 용담사를 찾았습니다.용담사는 찾는길은 교행이 불가능하나 중간중간 차의 피난지가 있어 찾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경내에는 널은 주차장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용담사석불로 불리며 경내가 아닌 야산 언덕부근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용담사(龍潭寺)는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산16번지에 있다. 1962년에 창건되었다. 고려시대의 석불 입상이 있다. 1978년에 송암리에서 대좌를, 선당리에서 석불을 옮겨온 것이다. 법화종 계열이다. 대좌와 석불을 접합하여 놓았습니다. ‘송암리관련항목 보기 불상’ 또는 ‘선당리 석불’ 등으로 불려왔으나 1978년 12월 지금의 용담사로 옮겨져 관리되고 있어, 이후로는 ‘용담사 석불입상’으로 명칭이 통일되어야 할 것이다. 이 불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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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면 비암사 극락보전옆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부재입니다. 다른 유물들을 보다보면 놓치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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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백석정 건물은 신교가 이 주변 경관 중에서 특히 흰 돌(白石)을 유독 좋아하여 1677년 봄에 창건을 하고 이후 1737년 그의 손자인 화은처사가 중수를 하였고 다시 1927년에 공의 7대손이 2차 중수, 1987년에 보수를 한 것으로 사진의 기문비석은 정자의 창건과 중수, 2차 중수 등의 내력을 수록한 비석으로 1986년 고령신씨 중종에서 건립을 하였다. 백석정기의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흰돌위에 정자를 지으시고 그 이름을 백석정이라 하시니 이 정자는 나의 종숙께서 손수 지으신것이다. 종숙께서는 젊은시절 기이한 기품을 지으셨고 만리심이 있으셨는데 갑자기 세상살이에 싫증이 나시어 사방을 둘러 보시니 마침 소유처럼 경치 좋은곳이 있는지라 대체로 질타당할것을 무릅쓰고 그 풍광에 빠지시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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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용리 삼층석탑이 있는 가덕면에는 가덕(加德)이라는 지명에 대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지명은 인차리에 위치하는 가덕산에서 유래되었다.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 향토 사료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시대 인조가 보은을 가기 위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밖에서 은은한 풍악 소리가 울리며 백발노인이 다가와 '장차 이 고을은 선비의 고장으로 숭상될 것이오나 삼가 헤아려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인조가 놀라 잠에서 깨어 앞산을 바라보니 영롱한 빛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어 '더욱 덕을 가하라.'라는 유시를 남겼는데, 이때부터 지명이 가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에전에는 가정집에 부처를 모신 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지금은 가정집으로 바뀌었는지 절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