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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전설따라 삼천리 (11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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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계1리는 청성면사무소 와 청성초등학교가 위치한 청성면의 중앙부에 있다. 동쪽과 남쪽은 보청천을 경계 로 청산면 신매리·궁촌리 와 접하며, 서쪽은 산계3리 안임이, 북쪽은 저점산성을 경계로 거포리와 접한다. 마을의 유래는 산계1리를 신라 때 만든 굴산성屈山城으로 추정되는 성이 있어 산성이라 부른다. 자연마을은 산성, 계하(성저) 등이 있다. - 산성山城: 면소재지로 마을 바로 동쪽에 산계리 토성이 있다. - 성안: 산계리산성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 성저(성밑): 산계리산성 아래 마을이다. - 산계리산성: 해발 150m의 신라 산성으로 둘레가 1,500m이다. - 굴산성屈山城: 산계리토성으로 추정되며 신라 소지왕 때인 486년에 이곳에 이창과 실 죽장군이 일선지방 경북(선산군) 장정 3,000명을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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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동리는 화성리의 동북부 계곡에 위치하며 마을 남단을 19번 국도가 통과한다. 지리적 으로 북부는 산지로 둘러싸인 배산임수형의 안정된 마을이다. 이 마을 동쪽 계곡과 남쪽 은 평야지로 벼와 사과 등을 재배한다. 동쪽은 장연리, 남쪽은 석성리 남동단, 서쪽은 석 성리와 대안리 귀곡, 북쪽은 도곡리와 접한다.화동리和洞里의 옛 지명은 되기, 두억, 대화동大和洞이었다. 되기의 ‘되’는 벼를 대는 되에 서 연유하여 벼 화禾가 되고, 기는 터 기基로 마을 의미로 마을 동洞 자가 되어 화동禾洞이라 하다가 화동和洞으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자연마을은 화동과 소화동 등이 있다. 대한제국 시대부터 1929년까지 청서면의 소재지 였다. 주요 성씨는 이천서씨로, 장릉절신 사인공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단종 때 절..
감곡면 영산1리 부가촌(잿말) 마을표지석입니다. 부자가 많은동네라 부가촌일까? 아니면 부자가 되고 싶어서 부가촌일까? 과거형이든 미래형이든 부자는 좋은가 보다. 2016년에 세운 마을 표지석이다.
영산리는 감곡면 소재지에서 8㎞ 떨어진 지점에 있다. 원통산 자락에 위치하며 앞으로는 공산정천이 흐르는 농촌 마을이다. 본래 충주군 감미곡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 행정구역 개편 때에 거동(巨洞), 영촌(嶺村), 공산리(公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영촌과 공산리에서 이름을 따서 영산리라 하고 감곡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거둥터, 건너새터, 공산정이, 두덩골, 바리고개, 비아다리, 상짓말, 알고지, 양짓말, 엄장골, 우뢰편, 잔자골, 재말(영촌) 등이 있다. 거둥터는 전에 임금이 거동하였던 곳이라는 뜻이다. 공산정이는 마을 뒷 산이 공(公)자 처럼 되었으며,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덩골은 지형이 두덩처럼 생겼다고 한다. 상짓말은 산지기가 사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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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다리의 마을표지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마을은 삼국시대의 백제의 상당현에 속하였고 고종22년에는 청주군 산외일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청원군 북일면에 편입되어 2000년 1월1일 내수읍 승격으로 내수읍 세교1리 "가는다리"라 불리어 오고있다. 지리적 위치는 북동은 초정약수와 구녀산 남은 상당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북에서 서로 석화천이 마을중심은 옻샘에서 발원한 세교천이 흐르고 수령 300년의 버드나무가 마을의 상징이며 마을의 중심은 장터 동은 담안과 물레방아거리 남은 요곡의 4개의 자연부락이 합쳐 가는다리(세교리)이다. 지명의 유래 "가는다리"는 석화리(돌꼬지)의 낚시바위에서 장터로 놓였던 길고 가는다리에서 유래한 것이며 조선지지자료(1914년 이전)의 기록에 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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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리에 역참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용원(龍院)이라 불렸다. 옛날 한양에서 내려오는 영남대로의 길목으로서 북쪽의 노은면과도 통하는 용원삼거리에 자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개경 또는 한성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죽산·장호원 등에서 차령산맥을 넘어와 머무는 역원인 용안역(用安驛)이 있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외용에 용안역이 관거(官距) 45리에 있었고 충주 연원역(連原驛) 소속으로 노(奴) 103명, 비(婢) 81명, 대마(大馬) 2필, 복마(卜馬) 5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충원현조(忠原縣條)에 용안리는 당시 주민이 95호에 남자가 278명, 여자 369명 도합 647명이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안용안[內龍洞]과 외룡동(外龍洞)으로 나뉘었다가 1914년 행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