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화양동 암각자
- 청풍문화재단지
- 부여박물관
- 밀양박씨
- 보성오씨
- 충주박물관
- 오블완
- 상당산성
- 단지주혈
- 문경새재
- 효자문
- 티스토리챌린지
- 국립청주박물관
- 법주사
- 곡산연씨
- 부도
- 화양구곡
- 경주김씨
- 문의문화재단지
- 청주박물관
- 효자각
- 한독의약박물관
- 사인암
- 사과과수원
- 선돌
- 각연사
- 공산성 선정비
- 공주박물관
- 충북의 문화재
- Today
- Total
목록중원의 향기 (83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통점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전주이씨의 재실인 효성재입니다 근간에 신축하였으며 효성재(孝誠齋)라는 현판을 걸고 있습니다.
주덕읍 대곡리 석포마을 들어가는 입구 우사 건너편에 얕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전학동 효자비가 있는 전학동 묘소옆에 자리하고 있다. 대곡리 석포마을은 천안전씨 곡산공파가 일가를 이루고 사는 마을이다. 고인돌 앞에 서있는 표지석을 보면 이 고인돌은 혜성 전홍각을 위해 가족들이 설치한 것으로 보여진다. 표지석의 글을 살펴보면 혜성전홍각님 담대한 성품 끝없는 질주 두려움없이 활보하시고 풍는 뜻 너무 커서 이 세상에 담지 못하시니 하늘에 오르시어 그 뜻 펼치시고 평안히 안식하소서 2008년 10월 30일 아내와 아들이 표지석을 세웠다. 또 다른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곡산 고인돌 태고의 신비 환성군 천안전씨 시조되고 백헌문효공 천년의 꿈 실천하니 선대유지 효심 받들어 곡산공이 이 곳에서 자손..
사락리는 법정리(法定里)로서, 1898년『忠淸道邑誌』에 의하면 충주군 德面面의 9개리 중에 황금곡리(黃金谷里), 사락리(社樂里)가 보이고, 1912년『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는 충주군 덕면(德面) 26개리 중 용동(龍洞)2), 매남리(梅南里), 사락리, 중리..
세계화와 디지털 시대의 쾌속 질주 속에서 “시는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2004)라는 산문에서 신경림은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1956년에 ‘갈대’로 등단해 60년간 활동해온 현역 시인이 21세기를 맞으며 실감한 것은 시의 ‘무능’이었다. 이제 시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며, 인간과 삶의 실상을 보편적인 언어로 노래할 수 없다. 적어도, 시가 이렇게 무능해졌다는 소문이 번지고 있다. 신경림은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에 걸쳐 자신이 시를 통해 해온 일들이 별안간 부정되는 사태에 당혹한다..
충주시 앙성면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입니다. 석뷸입상까지 쇄석을 이용해 도로룰 만들어 놓았다.나름대로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흔적이 남아있다.강천리 석조여래입상이라는 간판이 서있다. 몇번이고 발길을 한 곳이지만 갈때마다 새로움은 어린 내 마음탓인가? 충주 강천리 석불입상은 불신이 네모난 평판석에 가까우며 옷주름의 조각이 소략한 상이다. 머리는 소발이며 오른쪽이 훼손되었으나 낮은 육계가 보인다. 미간에는 백호가 표현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얼굴은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둥근 눈과 작은 코를 볼 수 있다. 귀는 짧게 표현하였고 목은 시멘트로 보강하였다. 목에는 떨어진 불두를 보강하면서 철심을 박았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은 많은데 석불입상은 변한게 없다며 한탄하시던 동네 할머..
주덕읍 화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풍산김씨 충주파 중시조인 김호의 재실이다.원래의 용도는 풍산김씨문중의 강당으로 문중교육시설이였으나 지금은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지명도 강당에서 유래하여 강당길로 불리우고 있다. 풍산김씨 유래와 충주 입향조인 시조(始祖) 김문적(金文迪)은 안동부의 풍산현 사람으로 고려조에 벼슬이 판상사(判相事)로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게 되었다. 풍산김씨 충주파 시조의 휘(諱)는 호(鎬)이며 관은 내직 통훈봉상시정이며 외직은 군수이다. 그는 시조(始祖) 문적의 13세손이다 그의 名祖는 6대조 고려 봉익대부 삼사 좌윤 휘 안정(安鼎)이고 그의 아드님 휘 자량(子良)인데 고려조의 시중이고 조선조에서 5조의 판서를 역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