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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95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신도비의 건립시기는 단기4288년(서기 1955년)에 후손들의 의해서 세워졌다. 구사리 마을입구 솔숲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구사리는 낙안오씨 집성촌으로 석성군 오연의 후손들로 누대를 이어 정착하여 거주한 곳이다.또한 열망골과 오룡동은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안오씨의 낙안(樂安)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승주군(昇州郡)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시대의 분차군(分嵯郡 : 分 郡이라고도 한다)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분령군(分嶺郡)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낙안군으로 개칭하여 나주(羅州)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도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고 군으로 승격하기도 하였느데, 선조 때 군(郡)이 되었다가 190..
문의면 구룡리 구사리마을에 있는 기자석입니다.구사리 마을은 낙안오씨들의 집성촌입니다. 마을초입에 자리한 낙안군 오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옆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아직도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주는지 사람들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구사리는 석성군 오사룡의 후손들이 누대로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그 밑에 동네인 구룡리에는 경주최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자석을 세우고 그 주위로 막돌등을 이용하여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동리주민들의 치성터로 알려져 있습니다.방문한 날도 한지에 밤,대추등의 제물과 함께 무병장수의 상징인 실타래와 함께 양초등이 있었습니다. 또는 남근숭배(男根崇拜) 로 남근처럼 생긴 돌이나 나무 따위의 자연물이나 남근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 생산의 신(神), 개운(開運)의 신으로 믿고 받드는 원..
가덕면 노동2리 갈현마을 입구에 있는 선돌입니다.정월대보름 동제의 대상으로 마을중앙에 있는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주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갈골마을을 찾은 날도 바람만이 휑하니 불고 인적은 없고 젊은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점점 공동화 되어가는 농촌의 현실이 피부에 와 닿습니다. 그래도 선돌은 머리에 띠두르고 정갈한 황토흙 대접받았으니 그나마 다행인듯 합니다. 마을의 안녕과 함께 동리민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간난한 세월 동행해주는 친구노릇을 하는것 같습니다. 선돌은 한 쌍으로 반대편 마을에도 1기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덕면 노동2리 갈골마을 입구에 있는 선돌입니다.정월보름 동제로 주민들의 관신을 먹고 있습니다. 동네의 안녕과 함께 액막이 개념의 선돌로 보입니다. 반대편 입구에도 1기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동네 주민들과 함께 해온 세월이 돌위로 보이는것 같습니다.멀리 보이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갈골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개념입니다.
기산사(箕山祠)는 한일병합(韓日倂合) 때 순절한 조장하(趙章夏)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사당으로 1949년에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89년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마루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기산사(箕山祠)’라는 편액을 걸었다. 마당 앞에는 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조장하는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자는 경헌(景憲), 호는 이재(履齋)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加德面) 출신이다. 유학을 공부하여 충효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으며, 부모상을 당하자 6년 간 시묘살이 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아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독서에 열중하였다. 일찍이 임헌회(任憲晦)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했다.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이..
청남대 가는길로 차를 몰고 길을 재촉하다보면 중간에 문의면 상장리 피미마을을 만나게 된다. 대청호반을 끼고 조금만 길을 걸으면 수몰된 후 몇가구 남지 않은 피미마을 을 만나게 된다. 인적없는 피미마을을 둘러보고 큰길가로 나오는데 산등성이로 건물이 한 채 보인다. 멀리서 보니 조금 특이한 모양새 입니다. 궁금증에 산을 조금 올라 건물을 살펴보니 아마 이 곳이 고향인분이 작은 쉼터를 만들어 놓은것 같다. 주말로만 이 곳을 다녀가는지 사람의 손길이 끊겨 있다. 건물은 깔끔하게 흙벽으로 창도 잘내고 참 아담하게 지어 놓았다.등나무와 조화를 이룬 집이 참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