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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95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월리사 입구의 왼쪽 언덕에 부도와 나란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장방형에 가까운 자연석을 가로 170㎝× 세로 100㎝로 다듬고 중앙에 홈을 마련한 비좌 위에 너비 83㎝× 높이 152㎝× 두께 24㎝의 비신을 세운 다음, 가로 110㎝× 세로 68㎝× 높이 52㎝의 팔작지붕형 개석을 덮은 조선후기 일반형 석비이다.월리사를 중건하고 나서 그 사적을 새긴 비석으로 비액에는 자경(字徑) 9.5㎝의 전서(篆書)로 ‘월리사사적비기(月裡寺事蹟碑記)’이라 쓰여 있으며, 비문은 자경 5㎝의 해서체로 문의현령 윤동형(尹東衡)이 기(記)하고 덕촌거사(德村居士) 오익기(吳益基)가 서(書)하여 1665년(현종 6) 냉절(冷節, 寒食節)에 세운 것으로 명기(銘記)되어 있다. 뒷면에는 시주 명단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부도와 금표..
문의면 문덕리 월리사입구초입에 있는 부도입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입니다.상륜부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문의면 문덕리 월리사 입구의 왼편 언덕에 서 있는 석종형 부도로서 방형의 편마암계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을 올려놓은 단순한 형태입니다. 탑신에는 아무런 문양이 새겨지지 않았고, 상륜부는 연꽃 봉우리 형태로 만들었습니다.일제시대 이후 수 차례 도괴되어 개울가에 방치되던 것을 마을에 사는 신도들이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부도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탑신부에 ‘이구당포윤(離垢堂抱允)’의 탑으로 병오년 4월 6일에 세웠음이 음각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월리사에 주재하던 포윤(抱允) 스님의 사리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립시기는 연호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후..
월리사 대웅전은 1657년(효종 8)에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이웃에 있던 신흥사(新興寺)를 옮겨 지은 것으로 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처마 끝에 장식된 암막새기와에 ‘옹정경술(雍正庚戊)’이라는 양각글씨가 있어 1730년(영조 6) 에 한차례 중수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건축양식으로 보아서도 조선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다포식이다. 자연석으로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의 주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우주(隅柱)가 평주(平柱)보다 훨씬 굵고 높다. 앞면의 기둥 사이는 모두 정자문(井字門)을 달았으며 두공은 조밀하게 배치하고 살미 끝은 날카롭게 휘어졌다.처마는 겹처마로 앞면의 양쪽 끝에는 활주를 세워 하늘을 향해 날아갈듯이 반전한 추녀..
문의면 미천6구 마을회관앞에 있는 동래인 정헌영의 공적비입니다. 정헌영 공적비라고 한글로 적혀있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정헌영의 공적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공적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도자 정헌영은 산자수명한 농촌 작두산 명기를 타고 1935년 음력 1월6일 새터마을에서 태어나 서울명문고를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하다 고향에 뜻을 두고 귀향하여 온갖 정성을 다 바쳐온 겨레의 횃불이다. 미천6구 이장으로 장구한 세월을 봉직하면서 살기좋은 마을 가꾸기로 마을길 조성 지하식수 완전해결 및 하수구 처리등 문화시설에 힘써왔고 특히 우리들의 숙원사업인 노인복지회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미천리6구 527-1번지 30평을 회관부지로 희사하여 마을회관을 준공시키는 등 남다른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헌신봉사하여 마을발전에 기여..
문의면 구룡리에 있는 이 충효각은 1861년( 철종 12)에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과 싸우다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증직된 최응허(崔應虛)와 효행으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에 증직된 그의 아들 최란선(崔蘭善) 부자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효각은 1861년에 중건하고 1984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2개의 충효문 편액을 달았다. 최응허와 최란선은 부자(父子)관계입니다. 최응허와 최란선의 편액이 같이 걸려있습니다. 최응허는 (1572~1637)는 조선조의 충신으로 경주인으로 문의면 구룡리 출신입니다. 병자호란 때 청국(淸國)으로 끌려가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1681년(철종2)에 문의면 구룡리에 정문이 세..
구봉영당은 조선 고종 32년(1985)에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인(左翼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에 봉해진 문충공(文忠公)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영정을 경기도 양주의 종가에서 옮겨 봉안한 사당이다. 고령 신씨(高靈申氏)문중에서 매년 3월 5일과 9월 5일에 향사한다. 이곳에 봉안된 영정은 세조 1년(1445)에 그린 좌익공신상(左翼功臣像)으로 추정되는데, 관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110cm, 세로 167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이다.오른쪽에 보한재 신숙주의 진영(眞影)임을 알리는 (朝鮮領議政高靈府院君諡文忠號保閑齋申叔舟字부翁眞)이라는 제자(題字)가 있고 왼쪽에 신숙주가 죽은지 75년 후에 다시 칠하였다는 (成廟乙未公卒後七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