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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92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의문화재단지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출처와 제작년대등이 명확한 기와편입니다. 대부분의 기와는 개인소장품을 기증받아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도광5년(1825년) 과 숭정기원후 신유년(1681년)등 제작년대가 뚜렷한 기와 들입니다.청주동헌등에 사용되었던 기와들입니다.
문의문화재단지에 있는 중부지방 사대부집안의 양반가옥을 재현한 가옥입니다. 1994년도에 이곳에 건립하여 재현하였습니다. 양반가옥답게 안채의 뒷쪽으로는 가묘(家廟)를 설치하였습니다. 가묘는 그 집안의 가장 높은장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가묘(家廟)는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고조(高祖) 이하의 조상의 위패(位牌)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집안의 사당(祠堂)이다.제주는 장자(長子)만이 할 수 있고, 차자(次子) 이하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인격의 불평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단위의 공동체 내부에서 예를 세움으로써 제가(齊家)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뜻이다. 따라서 인간의 길흉시, 즉 관·혼·상·제 의식이 가묘를 중심으로 행하여진다. 사당의 위치는 정침 동편에 3간으로 짓는다. 앞에 문을 내고 문밖에 3층 계..
학평리는 면의 북부에 위치하며, 동은 북이면 석화리, 서는 내수리, 남은 도원리, 북은 북이면 서당리가 접해 있다.학평리 고인돌은 학평리 농로를 개설하면서 농로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다가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문의문화재 단지 고인돌 공원에 자리하게 되었다.윗면에는 성혈자국이 남아있습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문산리 문의문화재단지 내에 이전하여 복원해 놓은 조선시대 후기 가옥으로 원래 낭성면 관정리의 신방호씨가 살던 가옥을 옮겨와 지어졌다. 1994년 문화재단지로 옮겨졌으며 현존하는 건물은 -자형의 정면5칸 안채와 대문이 있는 ㄱ자형 광채가 초가지붕으로 남아있다. 안채 대청에 신주함이 설치되어 있다. 당시 부농의 주택으로 일반 초가집보다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고 있으며 가구 구조나 세부적인 치목기법이 매우 정교한 편이다. 전형적인 충북지역 민가 건축양식의 가옥이다.
이 민가는 ‘기역(ㄱ)’자 형태의 전통 목조기와집으로,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부강리)에서 김종철(金鍾喆) 씨가 살던 가옥을 이전, 복원한 것이다. 1995년에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2개의 동(棟)으로 이루어졌는데, 안채만 조선 후기에 지었고 광채는 새로 지었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가 ‘기역(ㄱ)’자 형태의 목조와가로, 납도리 3량가 구조이다. 광채는 ‘일(一)’자 형태이며 지붕을 얇은 판석으로 덮은 돌기와집(石瓦家)으로 중부지방의 산골마을에 흔한 양식이다. 1982년에 조사한 ‘전국 취락 및 전통 가옥(민가) 조사 기록대장’에 따르면, 1950년대까지 이 집에 거주한 송동촌 씨의 3대 선친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현..
미원면 수산리는 본래 청주군 산내일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판리, 송교리, 원산리와 외삼곡리, 대판리, 수곡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수곡과 원산의 이름을 따서 수산리라 하였다. 1987년 행정리동 분리로 너더리, 숫골, 스실을 수산1리로, 원미를 수산2리로 분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미원면 수산리 원미마을에 있던 고인돌로 도로공사로 인하여 길가에 방치되어 있다가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문의문화재 단지로 옮겨서 전시되고 있습니다.고인돌은 공사중 파괴 되었으며 현재는 뚜껑돌만 전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