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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화양구곡의 제7곡인 와룡암입니다. 길게 뻗은 암석이 마치 누워있는 용과 같다하여 와룡암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청천면 화양계곡 와룡암(靑川面 華陽溪谷 臥龍巖) (tistory.com) 청천면 화양계곡 와룡암(靑川面 華陽溪谷 臥龍巖) 궁석이 시내변에 옆으로 뻗혀 있어 전체 생감이 마치 용이 꿈틀 거리는 듯하고, 그 길이가 열길이나 되어 와룡암이다. 길이 만들어지면서 길 밑으로 바위가 묻혀있어 그 모습이 많이 변하였다. king6113.tistory.com 와룡암 - 임상주 - 維彼臥龍巖 저 누워 있는 와룡암만은 若垺乘風雲 풍운 타고 오르는 것 같네. 宛在水中央 완연히 물 한가운데 있는데 蒼痕背成文 푸른 물결이 얼룩문이 되었네. 知是南陽翁 알겠도다, 제갈공명이 變化爲此石 변화해 이 암석이 된 것을. 平生興復意 ..
청천면 화양계곡 학소대(靑川面 華陽溪谷 鶴巢臺) (tistory.com) 청천면 화양계곡 학소대(靑川面 華陽溪谷 鶴巢臺) 바위산 위에 낙낙장송이 오랜 성상의 옛일을 간직한채 여기저기서 있는데,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하였다.층층 바위암벽과 그 사이의 소나무들의 king6113.tistory.com 계곡에 물이 한창이다.밤새 내린비가 계곡을 가득채우고 앞으로 달린다. 조용한 계곡사이로 물소리가 소리내여 달리며 기운을 낸다.계곡에 접해 있는 학소대에는 학의 모습은 간곳 없고 푸른 소나무들만 층층암석 사이를 수놓고 있다. 학소대 암각자를 찍으려고 생각했는데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수량이 줄고 건널만 하면 도전해 볼일이다. 학소대 - 임상주 - 鶴巢問何年 학이 깃든지 얼마..
청주시 낭성면 관정리 지천가에 고령신씨의 정자인 백석정이 있습니다. 가까운 곳이니 바람도 쐴겸 시간이 나면 자주 들리는 곳입니다.이번에도 괴산 화양구곡을 다녀오다 들려보았습니다. 언제나 같은자리 같은 정자이지만 찾을 때 마다 느낌이 새롭습니다. 백석정은 조선 숙종3(1677년)에 東部主簿를 지낸 白石亭 신교(申灚 ; 1641∼1703년)가 세운 고령신씨의 정자이다. 현재의 정자는 1927년 후손들이 중건하였습니다. 관정리 마을 앞 도로를 따라 마을 끝자락을 돌아가면 마을 뒷산 중턱 절벽에 바위를 의지하여 자리하고 있다. 지형상 뒤편에 산을 두고 북향하여 바위에 입지하였으며, 백석정 아래에 넓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건물로의 진입은 절벽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약 10m 정도 들어가면 일각대문이 놓이고 그..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 등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이 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화양서원의 자리에 놓여 있다.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 22년(1696)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창건되던 해에 현판을 하사받아 숙종 42년(1716)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그릇된 세금징수로 심한 민폐를 끼쳐 철종 9년(1858)에 폐쇄되고, 논란 속에 고종 7년(1870) 건물이 헐리었다.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뒤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숙종 42년(171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윤봉구가 지었다.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
화양구곡의 제9곡인 파곶가에 있는 암벽에 새겨진 각자입니다. 이서李舒 이지형李趾亨의 이름과 함께 조병현趙秉鉉,조구하趙龜夏,조봉하趙鳳夏,박사호朴思浩,이택영李宅永,홍원석洪元錫 김희金憙 등의 이름도 각자되어 있습니다. 이서(李舒:1332~1410) 조선 전기에, 사헌부대사헌, 문하시랑찬성사 등을 역임한 문신입니다.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양백(陽伯) 또는 맹양(孟陽), 호는 당옹(戇翁)·송강(松岡). 고려 고종 때 시중(侍中)을 지낸 이연수(李延壽)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연경궁제학(延慶宮提學) 이기종(李起宗)이다. 홍주를 관향으로 한 것은 아버지 때부터이다.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쳐 군부좌랑(軍簿佐郎)에 올랐으나, 세상이 어지럽고 정치가 문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
원래 강원도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1912년 일본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조인된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 받았다. 잘려진 머리 부분을 붙일 때의 흔적과, 이마 부분의 백호(白毫)가 떨어져나가면서 입은 손상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관 위로 높이 솟아 있다. 볼이 통통한 네모난 얼굴에는 눈이 가느다랗게 새겨져 있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목에는 굵은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3줄의 목걸이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검지 손가락을 편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잡고 가슴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