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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조선 정조 11년(1787) 청주목 산외일면 비홍리(지금의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상리 비홍마을)에 세워졌다. 도암(道巖) 변익하(卞益夏, 1683∼1717)는 부모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손가락을 잘라( 斷指注血)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으며, 시묘살이 중 음식을 거르며 슬퍼하다가 서른다섯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한다. 지금의 효자각은 1968년 중건한 것이며 정면 1칸·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면에 낮은 벽을 쌓은 뒤 홍살로 막고 안에 편액을 걸었다. 초계변씨(草溪卞氏) 문중에서 관리한다. [卞益夏孝子閣]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효자처사변익하지문(孝子處士卞益夏之門)이라고 각자된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내수읍 저곡리로 접어들며 동네초입에 있는 효자 이주업의 기적비입니다. 저곡리는 완산이씨들의 집성촌입니다. 이주업(1909~1970)은 완산인으로 호는 효당이며 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새로 의성김씨를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다. 어머니가 우연히 병을 얻자 이주업은 아내와 함께 밤낮으로 시탕하며 효성을 다하였다. 특히 이주업은 단지하여 흐르는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주어 (단지주혈)어머니의 수명을 수개월 더 연장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극한 효성에도 어머니가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초종범절의 예의를 갖추어 행하는 한편 시묘살이 3년을 옛사람과 같이 하였다. 그 후 아버지 또한 노환으로 고생을 하자 아내와 함께 정성을 다하여 병구완을 해드렸다. 그러나 아버지 또한 세상을 떠나니 3년 시묘생활을 어머니때와..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2리 효자문 거리는 양천허씨(陽川許氏)3대에 걸친 효성을 기념하여 세운 효자각으로 유명하다.이 마을에서 태어난 허 증(許 橧, 字는 聖居)은 조선조 순종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학문이 높았으며 효행이 지극하였다. 그의 부친이 이질에 걸려 위태롭게 되자 밤낮으로 그 부친의 대변을 혀로 맛보면서 간병하였으며, 의원에게 치료할 방법을 묻자 의원은 산삼 이외에는 명약이 없다고 하였다. 마침 이 때는 장마철이라 홍수로 강물이 넘치고 냇물이 크게 불어나 건너갈 방법이 없었다. 이에 물가에서 크게 통곡을 하고 있으려니 홀연 세 개의 산삼이 떠내려와 부친께 갖다드린 즉 병이 나았다.또 어머니가 눈병이 나서 앞을 전혀 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자 혀로 어머니의 눈을 ..
석화리(돌꼬지, 석화)는 본래 청주군 산외이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돌로 꽂이를 이루었으므로 돌꽂이 또는 석화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대리, 소롱리, 대길리의 각 일부와 산외삼면의 비 중리 일부 를 병합하여 석화리라 해서 북이면에 편입되었다. 날이 춥다. 요즈음은 차들이 다니지 않는 옛길을 따라 옛님들을 찾아본다. 빙판이 진 길이지만 천천히 몰며 좌우를 살피다 보면 만날수 있는 멋진 기회를 주는 님들이 있다. 석화리에서 만난 정려비도 또한 그렇다. 마을 끝언저리 야트막한 야산아래 시멘트 블럭담을 두르고 있다. 이곳 석화리는 경주이씨들의 집성촌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서있습니다. 큰 길이 생기기전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던 길입니다.비석의 전면에는 진사호송당이혼지처열녀안정나씨지려(..
청풍문화재단지 비석군에 자리하고 있는 제천군수를 지낸 여흥인 민영완의 선정비입니다. 비석에는 행군수민영완청덕선정비(行郡守閔泳琬淸德善政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3104책 (탈초본 139책) 고종 35년 12월 27일 [양력2월7일] 병오 3/4 기사 1898년 光武 2년 光緖(淸/德宗) 24년 〈○〉 詔曰, 命中樞院議官洪鍾宇, 爲議政府總務局長, 任議政府總務局長洪鍾宇, 任內藏司長李容翊, 任尙衣司長李圭宰, 任奉常司副提調李容九, 任秘書院丞徐丙善, 任掌禮院少卿沈相璜, 兼任太醫院少卿李容九, 依願免兼任, 掌禮院掌禮李容九, 兼任掌禮院掌禮李圭宰·徐丙善, 軍部大臣官房副長參領李泰來, 命休職, 任參領金禎根, 甲山郡守金河聲, 靈巖郡守金中鉉, 旌義郡守康仁鎬, 金浦郡守崔基柱, 依願免本官, 任羅州郡守李鎬奭, 任靈巖郡守..
청풍문화재단지 비석군 중에 서있는 순찰사를 지낸 이승오의 선정비 입니다. 비석에는 순찰사이공승오선정비(巡察使李公 承五善政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이승오는 1865년(고종 2) 성균관대사성을 지내고, 이듬해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869년 예방승지를 지냈으며, 1877년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80년 홍문관부제학·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다시 이 해에 충청감사를 지낸 뒤 1885년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1886년 시강원 겸 보덕이 되었고, 이듬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또한 진하정사(陳賀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9년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이듬해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91년 의정부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또한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1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