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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송시열 (2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이지당은 군북면 이백리에 위치하고 있다.이백리(二栢里)는 원래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 속해있던 마을로, 후에 증약리(增若里), 자모리(自慕里), 이백리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1739년 여지도서에는 군북면 증약리라 하여 287호가 살았는데, 이때는 자모, 증약, 이백리를 관할하였다. 1891년 신묘장적에는 군북면 증약리에 172호가 살았는데, 이때는 자모와 비하동리(飛霞洞里)가 분리되고 증약리와 이백리만 관할하였다.1908년 군, 면의 행정구역 조정 때 군북면을 군북일소면(郡北一所面)과 군북이소면(郡北二所面)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증약리는 일소면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일제정비하면서, 일소면과 이소면을 합쳐 다시 군북면이라 고치면서 이때 증약리와 이백리로 나뉘었다. 이백리라 부르게 된 것은 ..
충북유형문화재 제 42호로 지정된 옥천이지당입니다. (118) 86.(kbs2박원숙의 같이 삽시다_옥천편/2022년4월~.영상 일부 방영)옥천 가볼만한 곳.구름바다를 볼수 있는 일출명소.옥천여행.장령산 #용암사 운해#이지당#부소담악 - YouTube 이지당은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서당으로 처음에는 각신동이라는 마을앞에 있었음으로 각신당이라 하였으나 그 뒤에 우암 송시열의 시전에 있는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 라는 문구에서 끝의"止" 자를 따서 이지당이라 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1901년 광무 5년에 옥천읍 옥각리의 금씨, 이씨, 조씨, 안씨, 네 문중에서 재건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건물 구조는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일곱칸 ..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에 있는 이지당을 들어서기전에 좌측으로 바위가 보인다.이바위에 우암 송시열이 쓴 이지당이라는 글씨가 암각되여 있다. 이지당은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서당으로 처음에는 각신동이라는 마을앞에 있었음으로 각신당이라 하였으나 그 뒤에 우암 송시열의 시전에 있는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 라는 문구에서 끝의"止" 자를 따서 이지당이라 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1901년 광무 5년에 옥천읍 옥각리의 금씨, 이씨, 조씨, 안씨, 네 문중에서 재건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건물 구조는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일곱칸 측면 한칸의 팔작인데 가운데 삼칸은 대청이고 서편의 삼칸 중 두칸이 방이고 한칸은 부엌이며,부엌 위를 이층으로 하여..
영동군 향토유적 제 16 호 조선 현종 7년(1666년) 창건된 서원으로 매계 조위(梅溪 曺偉), 송당 박영(松堂 朴英), 남정 김시창(嵐亭 金始昌), 오촌 박응훈(梧村 朴應勳)등 四先生을 봉안 하였으며, 봉안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 숙종말 삼괴당 남지언(三槐堂 南知言), 일석 박유동(一石 ..
청천면 화양리에 위치한 우암 송시열선생의 유적입니다 화양서원서 부터 만동묘 그리고 만동묘정비등 우암선생의 많은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 노론이 주도해 설립했으며, 다음해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곳은 송시열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친 연고지이며, 일찍이 명나라 의종의 '비례부동'(非禮不動) 4자의 친필을 얻어 암벽에 새기고 암자를 세웠던 곳이다. 또한 1717년에는 만동묘(萬東廟)가 세워졌던 곳으로서 노론집권기에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송시열을 제향한 전국 44개 서원 가운데 위세가 가장 큰 서원이었다. 화양서원은 권세가 막강하여 백성들의 폐해가 심했다. 즉 제수전(祭需錢)의 명목으로 각 군·현에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