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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증평읍 (5)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증평1리에 있는, 국조 단군을 모시는 사당(祠堂)이다.원래 이 곳은 일제강접기 시절 일제의 신사가 있던 자리였다. 현재는 단군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단군전 앞으로 공원도 만들어 놓아서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단군전 문인 홍익문 앞으로는 단군상과 단군전 건립에 물심양면..
증평읍사무소에서 괴산군 청안 방면으로 가다 증천교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청원군 초정 방면의 540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2.5㎞쯤에 왼편으로 덕상1리(연정) 마을안내석이 있다. 이 안내석을 따라 마을을 지나 뒷산에 오르면 있다. 조선시대인 1697년 12월에 세운 청안현 정수명현감(1678년 1월~1679년 11월)의 송덕비가 흙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2003년 겨울에 덕상1리(연정마을)이장 이종관(52세)에 의해 발견됐다. 2004년 3월에 청주고인쇄박물관 연구원 라경준외 향토사학자 2명의 확인을 거처 증평향토문화연구회에서 주변정리를 했다. 이는 청주에서 원평(죽리)을 지나 청안으로 가는 옛 길목에서 5m떨어진 산 언덕빼기 이다. 송덕비의 크기는 높이가 1m50㎝이고 넓이가 98㎝로 좌대도 없는..
조금 크고 멋없는 단순한 탑은 아버지 탑 그보다 조금은 작지만 아기자기한 탑은 어머니탑 두 탑 나란히 봄이오는 길목에서 해바라기 하고있다. 온전한 모습 간곳은 없어도 슬플때 의지가 되고 기쁠때 아우름이 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온전히 닮은 이름없는 돌무더기 처럼 보이는 자식 향한 부모의 마음이 탑이되여 먼 곳을 바라보고있다. [증평 탑선이마을 석탑을 보며]
황희석(黃希碩: ?∼1394)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武臣)으로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고려 때 시중(侍中) 유중(裕中)의 후손으로 판서(判書) 천록(天祿)의 아들이다. 본래는 출가했다가 우왕 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다. 우왕 7년(1381) 왜구가 명량향(鳴梁鄕)에 침입하는 등 전라도가 어수선해지자 체찰사로 파견됐고,후에 단주상만호(端州上萬戶)를 지냈다.고려 우왕 14년(1388)에 요동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 공양왕(恭讓王) 1년에는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봉됐다.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후 이성계의 명을 받아 정몽주 일파를 탄핵하는 임무를 수행하여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건국의 명분을 세웠다. 조선 태조 1년(1392) 8월 개국공..
이 석탑은 탑선마을의 일명사지(逸名寺址)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으로 마을에서 탑재와 잡석을 섞어 재건하였는데 원형을 크게 잃고 있다. 기단부는 갑석만 남아 있고 탑신부는 1, 2층의 탑신과 옥개석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기단 갑석은 현재 지대석으로 쓰이고 있으며 괴임이 마련되어 있다. 1층 탑신은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며 크기는 너비 61cm, 높이 22.5cm이고 옥개석은 3단의 받침에 1단의 괴임을 마련하였으며 크기는 너비 72cm, 높이 33cm이다. 2층 탑신은 아무런 조식이 없으며 크기는 너비 33cm, 높이 20cm이다. 옥개석은 3단의 받침이 마련되어 있으며 크기는 너비 68cm, 높이 30cm이다. 옥개석의 전각이 파손되었으나 낙수면은 평탄해 보이고 우주의 조각한 수법 등으로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