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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08 (52)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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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리 능골 강장자의 집터입구에 거북바위가 하나있다. 이 거북바위의 머리는 충주.주덕간 도로 건너편인 노계마을쪽을 향하고 있고 꽁무니쪽은 강장자집터를 향하고 있다. 이 거북바위가 노계마을쪽의 재물을 먹고 강장자 집터를 향하여 변을 보므로 노계는 못살게 되고 강장자는 부자가 되였다고 한다. 거북바위에 전하는 전설은 가까운 중앙탑면 하구암리에 있는 평강채씨거북돌에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거북이는 장수와 부의 상징으로 민초들의 바램과 더불어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래서 노계마을 사람들과 강장자마을 사람들이 서로 거북의 방향을 바꾸어 놓으며 부자가 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거북바위는 지금은 마을표지석 옆으로 옮겨져 있다. 원래 거북바위는 장자동터 큰 느티나무 옆에 있었다고 한다.그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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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리에 역참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용원(龍院)이라 불렸다. 옛날 한양에서 내려오는 영남대로의 길목으로서 북쪽의 노은면과도 통하는 용원삼거리에 자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개경 또는 한성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죽산·장호원 등에서 차령산맥을 넘어와 머무는 역원인 용안역(用安驛)이 있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외용에 용안역이 관거(官距) 45리에 있었고 충주 연원역(連原驛) 소속으로 노(奴) 103명, 비(婢) 81명, 대마(大馬) 2필, 복마(卜馬) 5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의 충원현조(忠原縣條)에 용안리는 당시 주민이 95호에 남자가 278명, 여자 369명 도합 647명이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안용안[內龍洞]과 외룡동(外龍洞)으로 나뉘었다가 1914년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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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사 오르는길 우측으로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숙종시절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과 엄찬의 공적비입니다.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지명 또한 비선거리라는 명칭이 생겼습니다. 소이면 비산리 비석거리에 있는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과 엄찬의 선정비입니다. 두 비석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비석의 크기나 모양등으로 보아 한사람의 솜씨인 듯 합니다. 이국헌이 충주목사로 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후임으로 충주 목사로 온 사람이 엄찬입니다. 엄찬은 1693년(숙종 19) 충주목사겸충주진관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전임 충주목사 이국헌(李國憲)이 갑자기 죽음을 당하자,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의심스러운 여섯 사람을 가두었다. 그런데 이국헌의 후임으로 온 충주목사 엄찬까지도 꾸짖고 욕보이자, 엄찬이 이국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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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대곡리 석포마을을 찾았습니다. 석포마을은 천안전씨들의 집성촌입니다. 마을입구에는 전오석의 효자문과 함께 비석2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효자문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않아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번 방문에 살펴보니 효자문의 지붕을 새로 해 놓았습니다. 올바른 기와는 쓰지 않았어도 무너지려고 하여 비닐을 덮어 놓았던 에전의 모습에 비해 보기는 좋습니다. 전오석은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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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니면 학성리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의 선정비입니다.이국헌은 조선 중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이다.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문숙(文叔),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이여연(李汝淵)이다. 이국헌은 1660년(현종 1) 증광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81년(숙종 7) 금산군수로 재직하며 선치(善治)하여 포상을 받았으며, 1691년(숙종 17) 충주목사로 있으면서 주치(州治)에서 6~7리 떨어져 있는 의창(義倉)인 양진창(揚津倉)을 호조의 승낙을 받아 주치와 금천(金遷)으로 옮겼다. 1693년(현종 19) 목사 윤가적(尹嘉績)과 함께 충주의 아전들에 의해 갑작스럽게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訴狀)을 올려서 혐의자 여섯 사람을 가두고 서울로 압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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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원평리 선조사지에 있는 고려시대 미륵석불입니다. 충주 원평리 석조여래입상은 신라 성덕왕 때 창건되었다가 병자호란 때 폐사되었다고 전하는 선조사지(善祖寺址)에 삼층석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습니다. 머리에 팔각의 보개를 얹고 있는 석불입상으로, 팔각의 넓은 보개는 석등의 옥개석을 연상하게 한다. 보개의 아랫면 가장자리에는 낙수 홈이 선으로 음각되었으며, 중앙에 원형으로 돌출부를 두었다. 이 돌출부가 불신의 머리에 닿아 있어 마치 육계처럼 보인다. 머리는 나발이고 얼굴은 넙적하여 풍만하다. 눈은 반개하고 있고 입술은 도톰하며 턱 아래에 이중턱을 표현해 후덕함을 나타내고 있다. 귀는 길게 표현해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하체보다 어깨가 넓어 당당한 느낌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