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상당산성
- 법주사
- 사인암
- 충주박물관
- 청풍문화재단지 비석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부여박물관
- 현충시설
- 공산성 선정비
- 경주김씨
- 각연사
- 단지주혈
- 화양동 암각자
- 청주박물관
- 충북의 문화재
- 밀양박씨
- 효자문
- 문의문화재단지
- 부도
- 화양구곡
- 효자각
- 공주박물관
- 사과과수원
- 곡산연씨
- 외사리 당간지주
- 청풍문화재단지
- 보성오씨
- 국립청주박물관
- 문경새재
- 선돌
- Today
- Total
목록2021/11 (5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성면 도장리 마장골에 있는 옥천인 육항의 단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통의대부행공주목사옥천육공항지단(通議大夫行公州牧使沃川陸公沆之壇)이라고 적혀있으며 무덤과 석물은 후대에 후보되었습니다. 육항은 목사공파로서 고려시대에 공주목사를 지낸 인물입니다.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하였습니다
청성면 도장리 마장부락에 있는 옥천인 육항의 신도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통의대부행공주목사옥천육공항지신도비(通議大夫行公州牧使沃川 陸公沆之神道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신도비 뒷쪽으로는 옥천육씨 목사공파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육항은 고려시대 공양왕 때 공주목사를 거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하였습니다.
동이면 금암3리 용곡에 있는 돌탑입니다. 원추형으로 돌려 쌓았으며 가운데는 괴석이 놓여있습니다. 마을의 안녕과 함께 병이나 여러가지 해(害)가 되는것으로 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함 같습니다. 마을 앞 공터를 포장하며 위치가 이동 된 듯 합니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정려문. 여산송씨(礪山宋氏) 송현기(宋鉉器)의 부인인 밀양박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55년에 세운 정려문이다. 흥덕구 강서사거리에서 청주가로수길을 따라 경부고속도로 청주 IC 방향으로 약 3.3㎞ 가량 가면 오른쪽에 수의동 강촌마을이 있는데, 이 정려문은 마을 입구 공터의 왼쪽에 있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지붕 옆면에 풍판을 달았다. 얕은 자연석 기단 위에 높이 약 1m 가량의 팔각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두공은 이익공 형식이며, 첨차 위의 전면에는 용머리 조각을, 후면에는 봉황의 머리를 조각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하였다. 건물 안에는 편액과, 중수기가 나란히 걸려있다.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는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 한금섬(韓金蟾), 이소사(李召史)의 정려문.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그의 두 소실이었던 한금섬과 이소사의 정절을 함께 기려 세운 정려문이다. 본래는 1595년(선조 28) 송상현만 정려되었으나, 1704년(숙종 30)에 두 소실이 정려됨에 따라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54년에 중수한 것이다. 한금섬은 본래 함흥(咸興)의 기생으로 송상현의 첩이었다. 13세에 송상현을 따라 동래(東萊)로 갔다가 임진왜란으로 동래성이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할 때 곁에서 시중을 들다가 적에게 잡혀 3일간 항거한 끝에 순절했다. 이소사는 이양녀(李良女)라고도 하는데, 송상현의 소실로 임진왜란 때 동래..
수의동 강상촌에 있는 송상현의 신도비입니다.신도비옆에는 신도비를 세우게 된 취지문이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충렬문의 오른쪽에 1983년 3월에 세운 송상현신도비의 번역비가 있다. 번역비는 화강석으로 된 거북대좌 위에 높이 235㎝, 폭 75㎝, 두께 42㎝의 오석 비신을 세웠으며, 그 위에 앞뒤로 각각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함께 물고 있는 모습의 이수를 얹었다. 원래의 신도비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점차 아는 이가 적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13대손 송칠용(宋七鏞), 송원용(宋源鏞), 송신용(宋信鏞)과 14대손 송해운(宋海雲), 송해현(宋海玹) 등이 상의하여 단국대학교 박천규(朴天圭) 교수에게 부탁해서 국한문으로 번역하고, 14대손 송해석(宋海碩)의 글씨로 번역비를 세운 것이다. 신도비가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