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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천면 귀만리 마을입구에 있는 석장승입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귀만리 귀만마을에서는 음력정월 14일 오전 8시에 마을입구 병목거리에 있는 석장승에서 장승제를 지내고 있다. 귀만리 석장승은 1950-60년대 사이에 마을에서 세웠다고는 하는데 그냥 마을어른들의 흘러가는 이야기인지 자세한 사항은 알수가 없습니다.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며,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이정표 구실도 한다. 대부분 남녀 1쌍을 세우고, 5방위 또는 경계 표시마다 11곳~12곳에 세운다. 솟대·돌무더기·서낭당·신목·선돌 등과 함께 동제 복합문화를 이룬다. 지역과 문화에 따라 장승·장성·장신·벅수·벅시·돌하루방·수살이·수살목이라고도 불린다. 재료에 따라서 목장승·석장승·복합장승으로 분류된다. 목장승의 형태는..
청천면 귀만리 마을입구 느티나무 뒷쪽 바위암벽에 각자되어 있는 각자입니다. 귀만동천 만포정(龜灣洞天 晩浦亭)이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괴산중에서도 청천면은 우암 송시열과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동네의 지명인 귀만리 또한 우암선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귀만동천 각자와 마주보고 있는 길 건너편으로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석장승 2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원면 옥화리 세심정 가는 길에 이홍복효자비와 같이 서있는 서계 이득윤선생의 유허비입니다. 서계이선생옥화유허비(西溪李先生玉華遺墟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이득윤李得胤 은 (1553~1630) 조선조의 인물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고려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유학자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易學)을 배우고,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었다. 1597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의성현령을 지냈다.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하여 고향에 머무르면서 김장생(金長生)·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
청천면 고성리에 있는 박창열의 공덕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박창열공덕비(朴昌烈功德碑)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그의 공덕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공덕내용은 1998년 고성리 마을회관을 지을 때 마을회관의 부지로 35평을 희사한 박찬열의 공을 잊지않기 위하여 1999년 1월 29일 고성리 주민일동의 이름으로 비석을 세웠습니다.
미원면 옥화리 마을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퍄평인 욱현의 선적비입니다. 종인욱현선적비(宗人煜鉉善蹟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윤욱현의 조상위함의 내용과 만경대 건축등에 일조한 그 선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석은 파평윤씨집의공파종중에서 1978년에 세웠습니다.
청주군 남일상면 면장을 지낸 노병설의 청덕비입니다. 비석의 모습등을 보아 기존의 비는 훼손되고 후대에 세로운 비석으로 새로 세운 듯 합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청주군남일상면장노병설청덕비(淸州郡南一上面長盧柄卨淸德碑)으로 적혀있으며 비석의 건립시기는 융희隆熙3년12월(1909년)로 후면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융희(隆熙)는 대한 제국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의 연호입니다. 쌍수리(쌍수, 역말) 본래 청주군 남일하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조때 율봉도찰방栗峯道察訪에 딸린 쌍수역이 있었으므로 상수 또는 역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계목리, 관기리 일부와 남일상면의 쌍수리 일부를 병합하여 쌍수리라하여 남일면에 편입됨, 1982년 공군사관학교 유치에 따라 쌍수 일부 역말, 계림 일대가 완전 이주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