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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가로수길로 유명한 수의동(綱常村)에 위치한송명휘의 처인 영일정씨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각이다.정려각은 영일정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41년(헌종 7)에 세운 정려각이다.돌과 시멘트를 배합하여 마련한 낮은 기단 위에 정려각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된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풍판을 달았다. 주춧돌은 자연석을 다듬어 낮게 기단 하부를 만들었고, 같은 돌을 귀접이한 4각 주춧돌로 상부를 삼았는데 상부의 높이와 지름은 대략 30㎝ 정도이다.충청북도기념물 151호로 지정되여 관리되고 있다.건물 안에는 정려각을 세운 경위를 적은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안에 걸린 편액에는 “孝婦 成均生員 贈童蒙敎官 朝奉大夫 宋明輝妻 贈令人 迎日鄭氏之閭 純廟丙子四月日命旌 今上辛丑三月日立(효부 성균생원..
동이면 금암리에 있는 옥천전씨세거지비와 함께 있는 인봉 전승업선생의 추모비입니다. 전승업(全承業, 1547 명종 2~1596 선조 29)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며 의병활동을 하였다. 옥천전씨는 옥천의 유력한 성씨 중 하나로 고려 말부터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전숙全淑이 판도판서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동이면東 二面 적하리(赤下里, 지시래)에 은거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전팽령의 손자인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열사 700명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이고,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곽씨 모친 하에 1547년(명종 2)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디 과거를 보는데 ..
화학리는 화일리(禾日里)와 학촌리(鶴村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화일리라 하여 74호가 1891년 기록에는 화일리에 22호, 학촌리에 29호 등으로 분구되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화일과 학촌이 합하여 화학리(禾鶴里)가 되었다. 1981년 엽송골, 마느실, 학촌이 화학1리로 수일이 화학2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일(禾日)리는 수일(壽逸)이라고도 하는데 나이가 많은 고령자가 많기 때문에 수일이라 부르기도 하고 벼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화일이라 한다고 하는데 그 유래는 분명치 않다. 화일리는 1972년부터 마을원로회의를 구성하고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그 실행을 위해 온 마을이 단합하는 모범을 보여왔고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오는..
괴석을 이용하여 마을자랑비를 만들었습니다. 화강석으로 만든 대석위에 괴석을 올려놓고 괴석에 홈을 파서 마을자랑비를 만들어 홈에 끼워넣었습니다. 오석에 답양리미을자랑비리고 쓰여 있으며 마을의 유래를 설명하였습니다. 답양리는 채운산을 비롯하여 사방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산촌마을이다. 가산천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라 하여 옛날에는 아름다울 가佳, 묏 산山을 써서 가산佳山이라 하였다. 답양리 면적은 10.87㎢이며 서쪽 채운산을 비롯 하여 동쪽은 용문산 등 500m급 산들이 둘러싸고 가산천이 북쪽으로부터 답양리 가산계곡을 휘돌아서 북서쪽 보은군 회남면 은운리로 흘러 대청호로 들어간다.답양리는 조선후기 『여지도서』 기록에 따르면 가산리佳山里에 속하였고, 1830년대 『옥천 읍지』에서는 옥천 관문에서 북쪽으로 ..
안내면 답양리에 위치한 가산사의 입구에 있는 돌탑입니다. 주위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아 놓았습니다. 풍수 지리적으로는 마을의 수구막이, 비보(裨補)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탑의 명칭은 탑, 조탑, 조산, 돌산, 토담, 수구막이, 거리제, 거리제 잡숫는 탑, 거리제 탑, 거리탑, 독닥거리, 정탑 등으로 불리는데, 각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성(性)[할아버지 탑, 할머니 탑, 남자 탑, 여자 탑, 내외 탑], 위치[바깥 탑, 안탑], 규모[큰탑, 작은 탑] 등에 따라 불리어지기도 하며, 축문에는 영탑지신(靈搭之神)으로 표현되고 있다. 탑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기단부, 탑 본체, 탑 윗돌, 내장물 등 네 요소로 구성되며, 돌탑의 형태는 돌을 수북하게 쌓은 누석형, 위아래를 둥글게 쌓은 원통형..
삼남리는 청성면 남부 중앙에 위치한 고지대 마을로 남쪽 방면에서 청성면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교통 요지이다. 면적은 4.99㎢, 인구는 109명이다. 동쪽은 영동군 용산면과 소서리, 서쪽은 양저리와 묘금리, 남쪽은 조천리, 북쪽은 장수리와 궁촌리와 인접하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에 『여지도서』 기록에 청산현 남면 조분리에 속하였고, 대한제국 때 청산 군남면 조분리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산군을 옥천군에 통합시키고 삼거동三巨洞과 차남리車南里를 합쳐 처음 삼남리三南里를 신설하고 옥천군 청남면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1929년 청성면에 편입하였다. 삼남리는 삼거리와 차남리를 합할 때 삼거리의 석 삼三 자와 차남리의 남녘 남南 자를 한 자씩 따서 삼남리라고 하였다. [주요지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