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촌( 綱常村)이라는 마을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정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강상촌( 綱常村)’이라 줄여 부른다고 하는 말이 전하니 충신과 더불어 열녀와 효부의 산실인 듯 하다

강상촌은 대대로 여산 송씨들의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는 충렬공(忠烈公)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을 모신 충렬사(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와 송상현 신도비,송상헌충렬각, 보호수, 밀양박씨(密陽朴氏)효열각, 연일정씨 효부각 등이 있다.

 

 

 

마을입구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그의 두 소실이었던 한금섬과 이소사(李召史)의 정절을 함께 기려 세운 정려문이 있다. 송상현은 1591년에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임지에 도착하여 방비를 굳게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 하자 이때 부사인 그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나타냈다.

그뒤 적군은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분전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임금님이 계신 북쪽을 향해 절하고 단정히 앉은 채 왜병에게 피살되었다.

일본장수인 히라요시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한금섬은 본래 함흥(咸興)의 기생으로 송상현의 첩이었다. 13세에 송상현을 따라 동래로 갔다가 임진왜란으로 동래성이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할 때 곁에서 시중을 들다가 적에게 잡혀 3일간 항거한 끝에 순절했다.

이소사는 송상현의 소실로 임진왜란 때 동래에 있다가 왜적에게 잡혀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 일본에서 풍신수길에게 수청을 들라고 할 때 죽기를 각오하고 항거하자 적장도 그녀의 절의에 탄복하여 풀어주었다. 그 후 귀국한 후에 송상현을 위하여 3년 복상(服喪)을 하였다고 한다. 송상현의 묘소는 선조 28년(1595) 동래에 있던 묘소를 지금 위치로 이장하고, 광해군 2년(1610)에 창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0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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