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오블완
- 티스토리챌린지
- 부도
- 청풍문화재단지
- 국립청주박물관
- 효자문
- 단지주혈
- 곡산연씨
- 문의문화재단지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문경새재
- 한독의약박물관
- 선돌
- 각연사
- 사인암
- 부여박물관
- 공산성 선정비
- 화양구곡
- 충북의 문화재
- 보성오씨
- 청주박물관
- 공주박물관
- 사과과수원
- 상당산성
- 효자각
- 법주사
- 경주김씨
- 충주박물관
- 화양동 암각자
- 밀양박씨
- Today
- Total
목록2024/03 (4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의면 상장리 피미마을입니다. 대청호 수몰로 인하여 많은 가구들이 떠나고 몇 집 남아있지 않습니다. 관에서 피미마을 숲길등을 조성하며 육각정등 많은 볼거리와 함께 산책길등을 조성하여 놓았습니다. 푸른 대청호반을 옆으로 하며 좋은사람들과 함께 산책하기에 참 좋은 길입니다. "대청호 절경 한눈에" 청주 문산길·피미숲길 연내 완공 (daum.net) "대청호 절경 한눈에" 청주 문산길·피미숲길 연내 완공 (청주=연합뉴스) 윤우용 기자 = 대청호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청주 문산길과 피미숲길이 올해 말 완공된다. 문의면 문산리 문산길(길이 3㎞)은 문의문화재단지∼대청호 조각공원∼ v.daum.net
노현리는 조선 영조 후반에 동면에 속하였으며 두만리와 노현리로 되어 있으나 정조 22년경에는 노현리로 개칭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직전에는 노현리가 상노리, 중노리, 하로리로 분리되었고, 능동과 동남리가 새로이 조성되어 두만리, 상노리, 중노리, 하노리, 능동, 시남리로 이루워져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시남리의 일부를 용흥면 괴곡리에 넘겨주고 노현리라 하여 가덕면에 편입되었다. 최근인 1990년에 주민의 원에 의하여 본래의 소속인 문의면으로 재편입되었다. 노현리는 오봉재와 뒷강변으로 줄지어 떼기러기가 갈대밭위로 나르는 형상으로 갈현리라 했던바 강변말, 마근이, 우기미, 신암, 뒷강변, 하노, 중노, 채촌말, 능동, 밤나무재, 소태골, 음담말을 말한다.
문의면 구룡리에 있는 이 충효각은 1861년( 철종 12)에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과 싸우다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증직된 최응허(崔應虛)와 효행으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에 증직된 그의 아들 최란선(崔蘭善) 부자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효각은 1861년에 중건하고 1984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2개의 충효문 편액을 달았다. 최응허와 최란선은 부자(父子)관계입니다. 최응허와 최란선의 편액이 같이 걸려있습니다. 최응허는 (1572~1637)는 조선조의 충신으로 경주인으로 문의면 구룡리 출신입니다. 병자호란 때 청국(淸國)으로 끌려가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1681년(철종2)에 문의면 구룡리에 정문이 세..
탄부면 임한리 솔밭에 있는 유홍선생의 시비(詩碑)니다. 하나는 주사 마유명과 주고받은 광국시이며 또 하나는 아버지의 친구분의 생신축시입니다. 주사마유명화답광국시( 主事馬維明和答光國詩)입니다.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황마(黃麻)로 구궐(九闕)을 돌이키게 하니 밝은 해가 나의 작은 정성을 비춰주네 한시(漢市)는 신풍(新風)의 술이요 태성(泰城)에는 세류(細柳)의 진영(陳營)이라. 귀향 길에는 흥이 저절로 나고 구슬같은 곡조로 꾀꼬리는 환송하는 듯 하네 압록강가에 봄이 깊으니 아름다운 경치가 십리(十里)에 환하구나 선군사마동기생신축시( 先君司馬同期生辰祝詩) 가을 국화꽃은 축수의 자리에 빛났고 기쁘고 즐거움이 아름다운 생신에 미치네 옥을 굴리는 듯 맑은 창곡은 흐르고 산이 기울도록 윗분은 취하셨네 의기양양한..
군서면 사기점 마을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석장승과 돌탑입니다. 원래는 마을주민들에 의하여 목장승을 세웠었는데 지금은 석장승으로 교체 해서 세워놓았습니다. 석장승 옆으로는 수살제개념의 돌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관아 건축물이다. 청안현의 동헌건문로 태종 5년(1405)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으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1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 1915년에도 수리가 있었고, 한때 청안지서로 사용되어 변형이 있었으나 1981년 복원하였다. 앞면 6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의 옆선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홑처마에 공포를 짜지 않은 형태이다. 주춧돌은 다듬은 돌과 자연돌을 함께 사용하였고, 둥근 기둥에 일부 네모 기둥을 세우기도 하였다. 일반적인 조선 후기의 동헌 건물에 비하여 격식을 낮추어 지은 검소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