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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박물관 구경하기/진주박물관(晋州博物館) (52)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조선 중기 진주 목사인 이상일(李尙逸)[1600~1674]의 선정을 기리는 비. 이상일은 1650~1654년에 걸쳐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보덕(輔德)으로 전임되어 진주를 떠나자, 1654년(효종 5)에 이상일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1973년에 옮겨와서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 비석군 가운데 있다. 비의 제목은 ‘牧使 李尙逸 去思碑(목사 이상일 거사비)’이다. 비문에 “四年爲百里安(사년위백리안 : 4년 동안 백리가 평안하였다)”이라는 글귀가 있어 이상일이 진주목사 재직 시 선정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순조3년 1803년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이문철은 경상우병사에 제수됨을 알수가 있다.權襈, 以備邊司言啓曰, 卽見摠戎使李仁秀, 水原留守曺允大, 廣州留守金載瓚, 江華留守韓用鐸, 京畿監司徐榮輔, 水使崔東岳, 永宗防禦使尹頣東, 平安監司金文淳, 兵使申大偀, 黃海兵使徐有和, 江原監司申獻朝, 統制使李潤謙, 慶尙左兵使金處漢, 右兵使李文喆, 忠淸兵使金爀 병사이공문철거사불망비(兵使李公文喆去思不忘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석은 성민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비석의 건립시기는 무진3월(戊辰3月)로 미루어 보아 1808년 3월이다.어떤 이유로 비석이 훼손되어 신묘(辛卯)12월인 1831년에 성민들에 의하여 다시 세워졌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은 비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진주는 1604년(선조 37) 이래로는 경상도 우병영, 1895년에는 진주관찰부, 1896년 이래로는 경상남도관찰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수령 이하 모든 관리와 일반인은 말에서 내리라는 표지로 이 비를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안에 있는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입구에 세워져 있다. 비에는 병사 및 관찰사 이외의 모든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 들어가라는 뜻의 ‘수령이하개하마비(守令以下 皆下馬碑)’의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보존상태가 좋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한규설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1887년(丁亥年 고종 24년) 병총판 한규설이 등짐장사들의 세금을 감해주는 등 선정을 한 것에 대해 7개 고을 등짐장사들이 협력하여 건립하였다. 1973년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내 비석군(碑石群)으로 이건(移建)하였다. 비의 제목은 “병총판한공규설혁폐불망비(兵總辦韓公圭卨革弊不忘碑)”로, 비의 보존상태가 좋지 못해 비명(碑銘)을 전부 읽을 수 없다. “정해 2월 칠읍부상립(丁亥 二月 七邑負商立)”이라 하여 건립연대(1887년, 고종 24)와 건립주체를 밝히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심하게 훼손되어 알 수 없다. 진주성내 비석군 가운데 서 있는데, 비의 훼손 상태가 심하여 보존 대책이 절실하다.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내에 위치한 김종일의 선정을 기리는 비. 1630년 진주판관을 지낸 노암(魯庵) 김종일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1630년 당년에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가진리 진주성 내 비석군에 위치하고 있다. 1973년에 진주성 내로 옮겨왔다. 높이 149㎝, 폭 78㎝, 두께 18㎝이며 정방형의 비신 위에 크고 섬세한 이수(螭首)를 이고 있다. 비의 제목은 ‘通判金侯宗一淸德善政碑(통판김후종일청덕선정비)’이다. ‘皇朝崇禎三年 八月 日建(황조숭정 3년 8월 일 건)’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건립연대(1630년 8월)를 명확히 알 수 있다.
泗川船津里新羅碑. 8세기 경, 통일신라 당시 사천 지역에서 만들어진 불교 비석.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앞면의 크기 760mm×240mm, 뒷면 760mm×180~230mm, 두께 180mm. 2004년 6월 29일에 경남문화재연구원(원장 박동백)가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진리 선진리성에서 주차장 부지 발굴조사를 벌이던 중 발견한 통일신라 시대의 비석으로, 출토 당시 이 신라비에는 앞뒤 면에 모두 46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원래 비석의 1/4정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아있는 신라비의 앞면에는 (1열)경득나마□□□(更得乃末□□□)…/ (2열)국주천운대왕상대등□(國主天雲大王上大等□)…/ (3열)신술시주총관소간(神述時州總官蘇干)…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열)향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