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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전설따라 삼천리/마을표지석 (10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도율리는 도촌(道村)과 율티(栗峙)가 합하여진 마을로서 옛기록에 이 마을만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조정때 도가실과 밤티를 합하여 도율리라 이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율리라 이름 짓게 된 것은 두 마을을 합치면서 도촌마을의 도(道)자와 율티의 율(栗)자를 한자씩 취하여 도율리라 칭하게 되었다. 도촌은 원래 “도가실”을 한자화할 때 발음대로 “도”를 길도(道)로, “실”을 마을촌(村)으로 사용하여 도촌(道村)으로 부르고 있으나 사실은 옥천~보은의 옛길은 이곳을 지나 월외~장선~동정~회인(보은)으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이 쉬어가거나 물건을 받아가는 도가(都家)가 있어 이 마을을 도가실이라 하였다. 율티는 옛말로 “밤티”를 한자화하여 밤율(栗) 고개티(峙)를 써서 ..
괴석을 이용하여 마을자랑비를 만들었습니다. 화강석으로 만든 대석위에 괴석을 올려놓고 괴석에 홈을 파서 마을자랑비를 만들어 홈에 끼워넣었습니다. 오석에 답양리미을자랑비리고 쓰여 있으며 마을의 유래를 설명하였습니다. 답양리는 채운산을 비롯하여 사방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산촌마을이다. 가산천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라 하여 옛날에는 아름다울 가佳, 묏 산山을 써서 가산佳山이라 하였다. 답양리 면적은 10.87㎢이며 서쪽 채운산을 비롯 하여 동쪽은 용문산 등 500m급 산들이 둘러싸고 가산천이 북쪽으로부터 답양리 가산계곡을 휘돌아서 북서쪽 보은군 회남면 은운리로 흘러 대청호로 들어간다.답양리는 조선후기 『여지도서』 기록에 따르면 가산리佳山里에 속하였고, 1830년대 『옥천 읍지』에서는 옥천 관문에서 북쪽으로 ..
귀화리는 구일리 북부에 위치하며 돌남산 동편 기슭과 퇴미산 사이의 구릉지인 고지대 에 위치하며 마을회관이 있다. 지리적으로 동쪽은 동이면 소도리, 남쪽은 귀죽리, 서쪽은 장야리, 서대리, 북쪽은 매화리, 동이면 남곡리와 접한다. 귀화는 구일리를 예부터 귀일貴日골이라 불러 귀할 귀貴에, 마을 앞산에 봄꽃이 많이 피어난다 하여 꽃 화花 자를 붙인 것에서 유래한다. 구일리는 옥천읍 동부 중앙에 위치하며 면적은 2.79㎢,이다. 동쪽은 퇴미산과 함박산 능선으로 동이면 평산리와 세산리, 남쪽은 원각리, 서쪽은 돌남산 능선으로 장야리와 서대리, 북쪽은 매화리 및 동이면 남곡리 구일농공단지와 접한다. 구일리는 조선시대에 발간된 『여지도서』나 『신묘장적』에 귀일리貴日里로 기록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귀..
금암3리는 용암마을이라고 불리우는 고창오씨들의 집성촌입니다. 금암리는 군동면(郡東面) 용암리(龍岩里)라 불리던 마을이며, 1739년 기록에는 군동면 용암리에 47호가 살았고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기록에는 55호에서 15세 이상 255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암리 유래는 마을 뒤에 용암사란 절이 있고 큰 바위들이 용같이 뻗었다 하여 용암말 이라 불렸고 옆마을이 목시, 목쇠인데 목쇠는 목금(木金)으로 목금의 금(金)자와 용암의 암(岩)자를 따서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쳐서 금암리가 되었다. 금암리에는 충청북도문화재인 1545년 송정 전팽령이 건립한 양신정(養神亭)과 1765년 유림들에 의해 세워진 목담서원이 있다. 목담서원(鶩潭書院)과 목담서원에 모셔진 사서공 전식 선생의 영정, 명종 때 ..
막지리(莫只里)는 원래 안내면 막지리에 속해 있던 마을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북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 보면 안내면 막지리라 하여 40호가 살았고, 1891년의 기록에는 46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내면에서 군북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막지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을이 강가에 위치하여 포전(浦田)이 많아 보리농사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이곳을 지나다 많은 보리밭을 보고 맥계(麥溪)라고 했다는 것. 이는 대대로 전해진 것으로, 막지리의 본래 지명은 맥계이며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 때 편리한대로 썼던 막지(莫只)라는 지명보다 본래 지명을 되찾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맥기,..
삼남리는 청성면 남부 중앙에 위치한 고지대 마을로 남쪽 방면에서 청성면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교통 요지이다. 면적은 4.99㎢,이다. 동쪽은 영동군 용산면과 소서리, 서쪽은 양저리와 묘금리, 남쪽은 조천리, 북쪽은 장수리와 궁촌리와 인접하고 있다. 원래 조선시대에 『여지도서』 기록에 청산현 남면 조분리에 속하였고, 대한제국 때 청산군 남면 조분리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산군을 옥천군에 통합시키고 삼거동三巨洞과 차남리車南里를 합쳐 처음 삼남리三南里를 신설하고 옥천군 청남면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1929년 청성면에 편입하였다. 삼남리는 삼거리와 차남리를 합할때 삼거리의 석삼三 자와 차남리의 남녘 남南 자를 한자씩 따서 삼남리라고 하였다. 삼남리 마을표지석이 보이는 길 건너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