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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835)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수안보면 화천리에 있는 느티나무입니다. 마을의 수호목으로 주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느티나무의 수세는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동리끝에는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리의 길이름이 은행정길인것으로 보아 은행나무가 길이름에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충주 화천리 은행정 은행나무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충주 화천리 은행정 은행나무 막상 은행나무 아래 다다르자 발걸음 떼기가 난감합니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알이 어찌나 많은... blog.naver.com 주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새끼줄을 두르고 있습니다. 나무앞으로는 제단도 마련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주덕읍지가 발간될 때만 해도 풍덕마을 방풍림비앞에 놓여있었으나 그 후 현장을 답사할 때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제내리 풍덕마을 앞 방풍림비 우측에 놓여있다. 마을 앞 논을 경지정리할 때 마을 서남쪽 장록개 토계원터에서 수습하여 옮겨 놓았다고 한다. 옥 개석 층급받침이 3단이며, 크기는 가로 55cm, 세 로 55cm, 높이 15cm이다 이 석탑부재는 토계원지(土階院址)에서 출토되었다고 합니다.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풍덕마을 서남쪽 장록개 앞뜰로 이미 경지정리가 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대소원과 용원 사이의 중간지점이며, 구전에 의하면 토계원터라고 한다. 경지정리 때 주초석과 구들 등이 나왔고 풍덕마을 앞에 있는 석탑부재도 이곳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 석조 보살좌상. 성불사 석불좌상은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의 성불사에 있던 불상으로 현재 충주박물관 야외전시실로 이전, 전시되고 있다. 불정면은 행정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지만 옛 충주에 속했던 지역이다. 높이 98㎝인 성불사 석불좌상은 전면에 덧칠을 하고 손목 이하 부분은 시멘트로 보수하였기 때문에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으나 원래의 모습은 짐작할 수 있다. 머리는 큰 편으로 원통형 보관을 썼으며 이목구비는 마멸이 심하여 어렴풋이 보일 뿐이지만, 코는 작게 표현하였고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다. 어깨는 당당하고 목에 장신구를 표현하고 있다. 법의는 편단우견으로 도식화된 평행 사선이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등 ..
충주박물관 제 1전시실 뒷쪽으로 가면 석탑부재와 문인석과 비석등이 많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인 봉산 표지석입니다. 몇 번을 다녀간 곳이지만 자세히 보질 않으면 알수가 없습니다. 표지석의 반 정도는 파손되었습니다. 봉산(封山)은 금산(禁山)과 마찬가지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한, 즉 금양(禁養)된 곳 자체를 뜻하기도 하였다. 봉산에는 왕이나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고 포의(胞衣 : 태아를 싸고 있는 막과 태반)를 묻기 위하여 정해진 태봉봉산(胎封封山), 황장목만을 생산하기 위한 황장봉산(黃腸封山), 밤나무재목을 생산하기 위한 율목봉산(栗木封山) 등이 있는데, 이 기능을 보아 봉산은 특수한 목적으로 정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봉산에 대해서는 특별한 보호를 하였다. 1436년(세종 18)의 기..
문바위에 대한 유래. 고려시대에 이곳에 문바우(바위)가 있어 문바우고개라 불리기 시작한 이 고개는 부근에 목화밭에서 목화따던 처녀를 스님이 데리고 문바우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인가문(人家門)이라고도 불리게 되었으며 이 구렁을 인가문골이라고도 했다. 서쪽에 절이 있어 많은 스님이 왕래하였으며 부근에 절에 대한 전설이 많다. 서기 1612년(광해 4년) 해평윤공 (휘 성임)께서 광문병과에 합격한 후 한림삼사를 역임한 뒤 보덕공을 제수받고 낙향 중 인가문 고개를 넘다 목이 말라 사경을 헤메던중 마침 조그마한 샘물이 있어 기갈을 면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여 그 후 이 고개를 윤갈미(尹渴迷) 또는 윤갈문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문바위는 서기 1970년 도로공사로 매몰되었던 것을 2000년 초에 동민이 합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