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문의문화재단지
- 곡산연씨
- 보성오씨
- 화양동 암각자
- 청주박물관
- 청풍문화재단지 비석
- 부도
- 국립청주박물관
- 효자각
- 상당산성
- 외사리 당간지주
- 경주김씨
- 효자문
- 문경새재
- 청풍문화재단지
- 화양구곡
- 사과과수원
- 법주사
- 단지주혈
- 선돌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밀양박씨
- 각연사
- 충북의 문화재
- 공주박물관
- 부여박물관
- 충주박물관
- 현충시설
- 공산성 선정비
- 사인암
- Today
- Total
목록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91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충신(선무원종공신)형조참의순창조공덕공공적비( 忠臣(宣武原從功臣)刑曹參議淳昌趙公德恭功績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조덕공(趙德我》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자는 사원 본관은 순창이다. 한성좌윤 조승의 둘째 아들이며 충신 조복의 종질이다. 괴산군 송평등에서 태어났으며 뒤에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로 옮겨 살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과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율곡의 문하에 있었고 유자(儒者)로 이름이 났다. 또한 마음이 활달하여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재덕과 지모(智謀)가 출중하고 용맹하여,일찍이 붓을 던지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웠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宣뿐官)이 되었다가 호조정랑(戶불1E卽)을 지냈다. 1584년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집으로 ..
충절(불사이군)국자진사순창조공신공적비( 忠節(不事二君)國子進士淳昌趙公紳功績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조신(趙神) 1324(고려충숙왕11)-1402(조선 태조 12)은 고려 말의 진사로서 호는 피세정(避世亭),본관은 순창이다. 문정공 조렴의 아들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불사이군( 不事二君 )의 절의를 지켜 1392년 (태조 1) 괴산군 문광면 송평리에 내려와 오마산 밑에 피세정을 짓고 은둔생활로 생애를 마쳤다. 백이 • 숙제와 안진경의 충절을 찬미했다. 그의 묘소는 문광면 송평리에 있고 문광면 광덕리에 있는 칠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조반(趙肺) 1528(중종 23)- 1593(선조 26)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순창이다. 부사 조종(趙樹의 증손이며 조복(趙服)의 아우이다.임진왜란 때 그의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왜군과 싸웠고,충주싸움에서 그의 형이 전사하자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였다. 벼슬은 사과에 이르렀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선무(宣武) 원종공신 에 추서(追敍)되었다. 묘소는 문광면 송평리에 있고 사당(칠충사)은 문광면 광덕리에 있다.【참고문헌】『괴산군지』 비석의 전면에는 충신선무공신공조참판순창조공반공적비(忠臣宣武功臣工曹參判淳昌趙公胖功績碑)라고 적혀있습니다.
문광면 광덕리 칠충사에 있는 순창인 조복의 공적비입니다. 후손들에 의하여 근간에 새로 세워졌습니다. 조복(趙服)1525(중종 20)~1592(선조 25)조선 중기 의 문신으로 자는 안중按例,본관은 순창이다. 부사(府使) 조종(趙滿)의 증손이다.어려서부터 영특하여 9세에는 이미 성인의 기국이 있었다. 군수를 역임하다가 사직하고 향리에서 한가히 지내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에게 “내 비록 늙고 아무 관직이 없다하나 국난을 당하여 어찌 편안히 앉아 있겠느냐.”라고 이르고 방백여 윤선각을 만나 그 의 군막에서 토적을 도울것을 자원하였다. 그러나 윤선각은 괴산으로 돌아가 군수와 함께 하라고 하였다.이에 괴산으로 돌아와 군수 이우(李現)와 의논하여 우정침 • 윤우 • 조덕수 • 승장 운우 등과 함께 창의 격문..
문광면 송평리 마을입구에 있는 상산인 김여성의 효자각입니다. 김여성(金礪成) 1503(연산군 9)~1575(선조 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성청(聖淸),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예조참판(禮曹參判) 지낸 김추(金樞)의 현손이며 승지(承旨)에 추증된 김승평(金昇平)의 아들이다. 중종반정에도 가담하여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선(錄選)되었고,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집안 사정이 가난하였으나 아우 김여신(金礪新)과 함께 수시로 부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때는 그 병세를 알아보기 위하여 변의 맛을 보아 가며 간호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 옆에 묘막(墓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1971년 충원안씨의 후손인 안대규(安大至), 안용규(安容至가 마을 앞산 밑에 선조인 충원백 안치기安致器를 추모하여 중종 20년 안광대(安廣大가 세웠던 모정芽事)터에 세운 정자이다.충원정은 문광면 광덕리 아미동에 목조팔작지붕기와집로 건립된 정자이다. 이 정자는 충원안씨(忠原安氏) 중시조(中始組)인 문영공(文烈公) 안한(安翰) 3대(代)가 학문과 충절로 국위를 선양하고 큰 공을 세워 3대가 각각 충원백(忠原伯)에 특봉되어 후손들이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525년(중종 20년) 4월에 건립하였다. 그 이후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는데, 1971년 후손인 안용규(安容窒)와 안대규(安大至)의 주도로 종중에서 뜻을 모아 모정터에 재건한 정자이다. 방문 한날에는 문광면지에 소개된 현판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