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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921)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先生嘗於孝廟諱日 曉起痛哭於巖上 仍吟一絶 後人號其巖曰泣弓 盖取荊湖故事也 歲丁酉方伯尹公憲柱 謁廟訖大書泣弓三字刻石 視後其誠意至矣 尙夏謹書先生絶句於其末云 此日知何日 孤衷上帝臨 侵晨痛哭後 抱膝更長吟 우암선생께서 일찍이 효종의 휘일에 일어나 바위 위에서 통곡하고 일절을 읊었다. 뒷사람들이 그 바위를 불러 읍궁이라고 하였다. 대개 형호의 고사를 취한 것이다. 정유년 방백 윤헌주가 사당을 참배하고 ‘읍궁암’ 석자를 크게 써서 바위에 새기어 후세에 보이니, 그 진실한 뜻이 지극하다. 권상하가 삼가 선생의 절구를 그 말미에 쓰니,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새벽이 되도록 통곡만 하다가, 또 다시 엎드려 무릎 끌어안고 탄식하노라” 라고 하였다. 청천면 화양계곡 읍궁암 (靑川面 華陽溪谷 ..
만동묘 주위로 펼쳐진 이곳 화양동은 조선시대 성리학 중심지 중 한 곳인 우암 송시열 유적이다.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조선시대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다. 만동묘의 자리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던 곳이다.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과 관련된 암서재, 하마비, 읍궁암, 송시열 무덤 및 신도비 외에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 ‘충효절의’·‘비례부동’이란 글을 새긴 곳이 많이 있다. 송시열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신이 깃..
이상면.이위재.이윤익,홍정답?.서상조(李商冕.李胃在.李潤翼,洪鼎榙.徐相祖)의 이름각자입니다. 위의 열거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자세한 내력은 알수가 없습니다. 화양계곡 암서재 주위의 암석에 각자되어 있는 이름입니다. 다섯명의 사람이 이 곳을 찾았다가 이름을 각자한 듯 합니다. 서상조에 대하여는 동일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말기의 문신인 서상종의 내력입니다. 서상조 (naver.com) 서상조 1830(순조 30)∼1905(고종 42).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경념(景念). 서복순(徐復淳)의 아들로 이조참의 서기순(徐耆淳)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2년(철종 3) 진 terms.naver.com
청천면 화양동에 소재한 만동묘안에 있는 만동묘정비입니다.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묘정비는 사원에 세우는 비로,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둡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사당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입니다. 비의 형태는 연꽃무늬를 새긴 바닥돌 위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입니다.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
대길리大吉里 장두남張斗南이라고 각자 되어 있습니다. 병자년 칠월일丙子年七月一日에 이 곳을 다녀갔습니다. 마애비형태로 바위면을 얕게 다듬어서 비석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병자년이면 장두남의 생몰년(1859~1942)으로 비추어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6년 병자년에 이 곳을 다녀가며 암각자를 새겼습니다.금사담가 암석벽에 이름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장두남 (naver.com) 장두남 조선시대 학자로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덕행이 뛰어났으며, 증직대부 찬의를 지냈다. 자가에 글방을 개설하고, 대길공회당 부지를 기부하였다. 저서로 《초사시집》과 《초사총론》이 있다. 본 term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