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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92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이상면.이위재.이윤익,홍정답?.서상조(李商冕.李胃在.李潤翼,洪鼎榙.徐相祖)의 이름각자입니다. 위의 열거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자세한 내력은 알수가 없습니다. 화양계곡 암서재 주위의 암석에 각자되어 있는 이름입니다. 다섯명의 사람이 이 곳을 찾았다가 이름을 각자한 듯 합니다. 서상조에 대하여는 동일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말기의 문신인 서상종의 내력입니다. 서상조 (naver.com) 서상조 1830(순조 30)∼1905(고종 42).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경념(景念). 서복순(徐復淳)의 아들로 이조참의 서기순(徐耆淳)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2년(철종 3) 진 terms.naver.com

청천면 화양동에 소재한 만동묘안에 있는 만동묘정비입니다.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묘정비는 사원에 세우는 비로,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둡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사당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입니다. 비의 형태는 연꽃무늬를 새긴 바닥돌 위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입니다.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

대길리大吉里 장두남張斗南이라고 각자 되어 있습니다. 병자년 칠월일丙子年七月一日에 이 곳을 다녀갔습니다. 마애비형태로 바위면을 얕게 다듬어서 비석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병자년이면 장두남의 생몰년(1859~1942)으로 비추어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6년 병자년에 이 곳을 다녀가며 암각자를 새겼습니다.금사담가 암석벽에 이름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장두남 (naver.com) 장두남 조선시대 학자로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덕행이 뛰어났으며, 증직대부 찬의를 지냈다. 자가에 글방을 개설하고, 대길공회당 부지를 기부하였다. 저서로 《초사시집》과 《초사총론》이 있다. 본 terms.naver.com

청천면 화양동 금사담가 암벽에 각자되어 있는 곽용종郭瑢種의 이름각자입니다. 곽용종에 대하여는 자세한 사항은 알수 없습니다. 다른글씨에 비하여 글씨의 크기도 작고 각선이 깊지 않습니다.자세히 보아야 알수 있습니다.

청천면 화양동 금사담가에 있는 커다란 암석에 각자되어 있는 장석구張錫龜의 이름각자입니다. 장석구에 대하여는 자세한 사항은 알수가 없습니다.

청천면 화양구곡의 제 4곡인 금사담가에 있는 암벽에 각자되어 있는 이후연李厚淵.변익래卞翊來.박재경朴在敬의 이름각자 입니다. 이후연 李厚淵 (1798-1863)은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학자이자 효자입니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만오(晩悟).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으로, 졸옹(拙翁) 이호중(李昊中)의 중손(中孫)이다. 이후연(李厚淵)은 신와 정재경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학문의 중심점을 캐어서 연구하였고 지식과 견문이 넓었다. 보고 들은 것이 많고 깨달은 바도 투철하여 정재경이 큰일을 맡을 만한 인물[大受之器]이라고 하였다. 동문(同門)들과 모든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문들과 제자들이 그의 학행(學行)을 사모하여 학문을 익히는 계(契)를 만들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