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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광면 광덕리 칠충사에 있는 순창인 조복의 공적비입니다. 후손들에 의하여 근간에 새로 세워졌습니다. 조복(趙服)1525(중종 20)~1592(선조 25)조선 중기 의 문신으로 자는 안중按例,본관은 순창이다. 부사(府使) 조종(趙滿)의 증손이다.어려서부터 영특하여 9세에는 이미 성인의 기국이 있었다. 군수를 역임하다가 사직하고 향리에서 한가히 지내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에게 “내 비록 늙고 아무 관직이 없다하나 국난을 당하여 어찌 편안히 앉아 있겠느냐.”라고 이르고 방백여 윤선각을 만나 그 의 군막에서 토적을 도울것을 자원하였다. 그러나 윤선각은 괴산으로 돌아가 군수와 함께 하라고 하였다.이에 괴산으로 돌아와 군수 이우(李現)와 의논하여 우정침 • 윤우 • 조덕수 • 승장 운우 등과 함께 창의 격문..
문광면 송평리 마을입구에 있는 상산인 김여성의 효자각입니다. 김여성(金礪成) 1503(연산군 9)~1575(선조 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성청(聖淸),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상산(商山)이다. 예조참판(禮曹參判) 지낸 김추(金樞)의 현손이며 승지(承旨)에 추증된 김승평(金昇平)의 아들이다. 중종반정에도 가담하여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선(錄選)되었고,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집안 사정이 가난하였으나 아우 김여신(金礪新)과 함께 수시로 부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때는 그 병세를 알아보기 위하여 변의 맛을 보아 가며 간호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 옆에 묘막(墓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1971년 충원안씨의 후손인 안대규(安大至), 안용규(安容至가 마을 앞산 밑에 선조인 충원백 안치기安致器를 추모하여 중종 20년 안광대(安廣大가 세웠던 모정芽事)터에 세운 정자이다.충원정은 문광면 광덕리 아미동에 목조팔작지붕기와집로 건립된 정자이다. 이 정자는 충원안씨(忠原安氏) 중시조(中始組)인 문영공(文烈公) 안한(安翰) 3대(代)가 학문과 충절로 국위를 선양하고 큰 공을 세워 3대가 각각 충원백(忠原伯)에 특봉되어 후손들이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525년(중종 20년) 4월에 건립하였다. 그 이후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는데, 1971년 후손인 안용규(安容窒)와 안대규(安大至)의 주도로 종중에서 뜻을 모아 모정터에 재건한 정자이다. 방문 한날에는 문광면지에 소개된 현판과..
만남이란 무엇일까? 몇번이고 찾고 찾았던 괴산군수 김경근의 비석. 무엇이 그리 애착심을 가졌을까? 괴산군에서 발간된 괴산군지에 단 한줄로 인용되었던 김경근의 애민선정비. 어찌보면 선정비라는것이 많은사람들로 부터 외면받는것은 이해하지만 하나하나의 존재는 그 이유가 있고 그 느낌이 있는것 같다. 신경쓰지 않으면 찾을수 없는 감경근의 선정비. 어찌보면 그 선정비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을 떠나 잊혀져가고 생각의 횟수가 적어지는 아픔을 겪는 그 나름의 부족함을 누군가가 찾아보는 빌길로 채워줄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바램이었다. 원하면 보인다고 했던가 ? 기억의 저편쪽으로 사라져가는 괴산군수 김경근의 비석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를 해본다. 정말로 많이 지나다니며 몇번이고 그 곁을 다녔지만 발견할 수 ..
얼마전에 보은읍 교사리 춘수골에 있는 조선조와 일제강점기 시절 보은현감과 군수의 공적비에 눈을 찌푸리게 하는 낙서를 발견하고서 국민신문고를 통해 민원을 제기하니 공적비등은 개인의 소유이므로 군 차원에서는 해줄수 있는게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나름 담당자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참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은에 일이 있어 춘수골 비석을 찾으니 역시나 그냥 그대로 아픈 얼굴을 보여준다. 참 마음이 쓰리다. 춘수골 비석은 언제까지 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야만 하는걸까? 보은 춘수골 비석의 수난 (tistory.com) 보은 춘수골 비석의 수난 보은읍 교사리 춘수골 입구에는 보은을 스쳐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절의 현감과 군수의 비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의해서 눈살을 찌..
문광면 흑석리 미륵불은 흑석리 상촌에서 동쪽에 있는 산의 20 m정도 오른 지점에 불상의 형식을 갖춘 석인상의 미륵불이 2기가 한 쌍으로 세워져 있다.흑석리 미륵불은 마을 공동의 수막살이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륵불(弼勤佛)은 고려 시대와 조선시대에 마을의 수구막으로 석불형 미륵불을 조성하기도 하였다.이 미륵불은 본래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괴산댐이 생기기 이전에 흑석리 아삽마을 아래 탑바위 물가에 있었는데, 흑석리 김천년(김상기1908〜1990, 법명: 무철)이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미륵불이 나타나‘내가 탑바위 아래 물에 묻혀있으니 꺼내 달라는 기이한 꿈을 꾸고 궁금해서 현지에 가보니 정말로 꿈에 보았던 미륵불이 있어 이 곳으로 옮겨 세워놓았다 한다.이 미륵불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