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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 (308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언제나 그리운 곳.눈을 마주치다 미안함에 슬쩍 눈돌리는 곳.시집간지 몇 해만에 친정집 온 누이같이 애닯은 곳.보고 있어도 보고싶고아무도 몰래 살짝 입맞춤하는 그리운 곳.외사리 당간지주
충북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비선거리에 있는 조선 숙종때 충주목사인 이국헌의 선정비입니다.목사이후국헌청덕애민선정비( 牧使李侯國憲淸德愛民善政碑 )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비석은 일체형으로 비두에는 구름무늬의 모양이 있습니다.음성 디지털문화대전에는 이채청의 비라고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정정을 하고자 여기저기 연락해 보아도 비지정이다 또는 비석의 위치가 다르다며 영 정정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이국헌의 비석옆에는 이국헌 다음으로 충주목사가 된 엄찬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습니다.이국헌의 아들이 엄찬의 곤장을 맞고 죽었으니 두 비석의 주인공들은 서로 원수일텐데 비석은 나란히 서있습니다.그 사연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비석은 말이 없습니다. 이국헌의 비석은 충주를 비롯하여 현재의 지명인 음성과 괴산등..
소이면 비산리 동네에서 미타사쪽으로 길을 재촉하다보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두기의 비석을 볼수 있습니다.동시대에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과 이국헌의 비석입니다.예전에는 이 길이 교통의 요충지로서 마굿간도 있었고 사람이 쉬어갈수 있는 주막도 있었다고 합니다.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니 고을수령등의 선정비도 있었을 거구요 이 비석이 서있는 거리다 하여 지명마저도 비선거리 입니다.비석은 크기에 비해 조금은 조각솜씨가 떨어지는것 같습니다. 비산리에 있는 조선조 충주목사를 지낸 엄찬의 선정비입니다. 옆에는 동 시대의 충주목사를 지낸 이국헌의 비석입니다.두 비석의 모습으로 보아 동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비두에는 태극문양등으로 모습을 내었지만 비석의 크기에 비해 글씨등은 조금은 서툰솜씨 입니다.이 비석들로 인하여 이..
음성디지털 문화대전에는 조선시대의 문신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나 제 생각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힘들었던 상당리 주민들을 위하여 세금대납과 식량등을 풀어 주민들을 빈곤에서 구한 상당리에 거주했던 최홍걸의 시혜비정도로 보면 좋을것 같습니다.비석은 상당리 주민들에 의하여 임신년(1932년)에 세워졌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소파거사최홍걸시혜불망비( 少坡居士崔弘杰施惠不忘碑 )라고 적혀있습니다.정억성효자비와 함께 나란히 서있습니다. 비석주변의 관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정억성은 일제강점기의 효자로서 공부자탄생2479년(1928년)에 음성군 명륜회장으로 부터 포상을 받은 효자입니다.원남면 상당리 옛날 마을초입길에 있습니다. 연일정공휘억성효자비( 延日鄭公諱億成孝子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석의 뒷면에는 정억성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억성의 아들 정만수가 일제강점기인 소화16년 (1941년)에 생전의 아버지의 포상내역(1928년)을 기록하여 동네 어귀에 세웠습니다. 효자비 전면에 있는 비석의 건립시기인 소화(昭和)16년인 신사년(辛巳年) 오월에 세웠습니다. 그 후 누군가의 의해 글자가 훼손되었으나 판독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보은 법주사 철솥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이다.신라시대 성덕왕대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지지만 법주사의 사세(寺勢)가 가장 융성했던 조선시대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철솥은 국내에 전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