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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교암리 동네에서 바라다 보면 커다란 무덤이 보입니다.은진인 송시도의 무덤입니다.무덤앞에는 신도비가 있고 옆에는 근래에 지은 재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송시도(宋時燾) 1613(광해군 5)~1689(숙종 15) │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은진 (恩津), 자는 성보(誠甫), 호는 세한재(歲寒齋)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에 증직된 송갑조(宋甲祚),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 송갑조의 4형제 중 넷째 아들로 옥천군 구룡촌 외가 에서 태어났으며,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동생이다. 부인은 월성 이씨(月城李氏)로 이복익(李復益)의 딸이다. 그는 주자학(朱子學)에 밝아 소우암(小尤庵)이라 불렸 으며, 형인 송시열과 연산(連山)의 사계 김장..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정진(朴廷璡) 인물 정보] (aks.ac.kr)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정진(朴廷璡) 인물 정보] [부(父)] [안항(鴈行)] 형(兄) : 박정원(朴廷瑗) 형(兄) : 박정기(朴廷琦) people.aks.ac.kr 박정진은 상산인으로 박상호의 할아버지이며 직위는 찰방을 지냈습니다.묘비중 가장 윗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찬선 묘비(朴纘先 墓碑)는 가첨석과 농대석을 갖춘 조선식(朝鮮式) 묘비로, 전면에는 7㎝ 해서로 묘표를 새기고, 후면과 양 측면에는 묘표문(墓表文)을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를 아울러 써서 2.8㎝ 해행으로 써서 새기었다. 우암이 비문을 쓴 예는 흔치 않아서, 그의 글씨를 연구하는 데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승정원일기 195책 (탈초본 10책) 현종 7년 6월 5일 갑인 4/12 기사 1666년 康熙(淸/聖祖) 5년 ○ 謝恩, 金山郡守閔重魯, 寶城郡守趙時一, 禮曹佐郞崔商翼, 工曹佐郞李猶龍, 新昌縣監朴纘先。 박찬선은 신창현감을 지냈으며 박상호의 부친이다.
소계리는 본래 보은군 수한면 지역으로서 소의 목이 되므로 소메기, 또는 우항(牛項)이라 하였는데, 1941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말관리(末串里)와 묘북리(묘北里)를 병합하여 소계리라 하였다. 박상호(朴商皓)는 1631(인조 9)~1684(숙종 10) │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공익(公翼)이다. 증조는 참판에 증직된 박치경(朴致敬), 할아버지는 찰방 박정진(朴 廷璡), 아버지는 신창현감(申昌縣監) 박찬선(朴纘先),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홍시정(洪時挺)의 딸이다. 부인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김자건(金自鍵)의 딸이며,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다. 할아버지 박정진이 구수복의 사위로 보은의 처가에 살고 있던 박현능(朴賢能)의 양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우암 송시열에게 배웠으며, 효행이 지..
유소령의 본관은 강릉으로 청성면 도장리에서 태어나 청성면 화성리 이천서씨利川徐氏 가문 서성기에게 출가하였다. 평소 효로써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의 뜻을 따르며 규문 閨門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악성 구창(口瘡: 입안이 허는 병증)으로 매일 고통을 받자 백방으로 좋은 약 을 구해다가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때 구창에는 사람의 살이 특효약이라는 풍문을 듣고는 자기의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달여 먹였다. 그러자 남편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1973년 4월 15일 옥천 군수에 의해 정렬표창貞烈表彰을 받았다. 마을 주민들은 제 살을 베어 남편을 살린 그녀의 굳은 심지와 가족을 아끼는 마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비석에 그녀의 행적을 새겨 청성면 화성리 화동마을 입구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