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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만동묘 주위로 펼쳐진 이곳 화양동은 조선시대 성리학 중심지 중 한 곳인 우암 송시열 유적이다.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조선시대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다. 만동묘의 자리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던 곳이다.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과 관련된 암서재, 하마비, 읍궁암, 송시열 무덤 및 신도비 외에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 ‘충효절의’·‘비례부동’이란 글을 새긴 곳이 많이 있다. 송시열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신이 깃..
이상면.이위재.이윤익,홍정답?.서상조(李商冕.李胃在.李潤翼,洪鼎榙.徐相祖)의 이름각자입니다. 위의 열거한 사람들에 대하여는 자세한 내력은 알수가 없습니다. 화양계곡 암서재 주위의 암석에 각자되어 있는 이름입니다. 다섯명의 사람이 이 곳을 찾았다가 이름을 각자한 듯 합니다. 서상조에 대하여는 동일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말기의 문신인 서상종의 내력입니다. 서상조 (naver.com) 서상조 1830(순조 30)∼1905(고종 42).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경념(景念). 서복순(徐復淳)의 아들로 이조참의 서기순(徐耆淳)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2년(철종 3) 진 terms.naver.com
보은읍 교사리 춘수골 입구에는 보은을 스쳐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시절의 현감과 군수의 비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의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단어들이 비석전면에 적혀 있습니다. 관리가 안되면 다른곳으로 옮기든지 글씨를 지웠으면 좋겠다고 국민신문고를 통해 민원을 넣었더니 지정된 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는 회신이 돌아왔습니다. 공적비 훼손한 몰지각한 낙서, 조속한 삭제 필요 - 보은신문 (boeuni.com) 공적비 훼손한 몰지각한 낙서, 조속한 삭제 필요 - 보은신문 지난 15일 한 독자로부터 보은읍 교사리 춘수골삼거리의 비석을 몰지각한 사람이 낙서를 하는 등 크게 훼손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현장을 확인결과 실제로 ‘예수 하늘 천송’ ‘조선을 www.boeuni.com 뭐 대단한것을 바라..
청천면 화양동에 소재한 만동묘안에 있는 만동묘정비입니다.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묘정비는 사원에 세우는 비로,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둡니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사당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입니다. 비의 형태는 연꽃무늬를 새긴 바닥돌 위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입니다.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
대길리大吉里 장두남張斗南이라고 각자 되어 있습니다. 병자년 칠월일丙子年七月一日에 이 곳을 다녀갔습니다. 마애비형태로 바위면을 얕게 다듬어서 비석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병자년이면 장두남의 생몰년(1859~1942)으로 비추어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6년 병자년에 이 곳을 다녀가며 암각자를 새겼습니다.금사담가 암석벽에 이름이 각자되어 있습니다. 장두남 (naver.com) 장두남 조선시대 학자로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덕행이 뛰어났으며, 증직대부 찬의를 지냈다. 자가에 글방을 개설하고, 대길공회당 부지를 기부하였다. 저서로 《초사시집》과 《초사총론》이 있다. 본 term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