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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낭성면 관정리에 있는 보한재 신숙주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묵정영당입니다. 야트막한 돌담을 쌓았으며 보수한지가 얼마 안되었는지 주위도 청결하니 관리가 잘되고 있습니다. 편의 시설로 주차장도 갖추어져 있고 주위로는 신중엄신도비와 함께 묵정서원등 고령신씨가문의 여러 유적들을 볼수가 있습니다. 신숙주 - Daum 백과 신숙주 신숙주(申叔舟, 1417~75)는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다. 사육신의 충절이 빛을 더하면 더할수록 그는 반비례로 변절자 · 겁쟁이 또는 시세를 추종한 자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그가 100.daum.net
증좌찬성고령신공중엄신도비명 고금을 통하여 수(壽)의 원리를 말씀한 중에 공자같은 분이 없었으니 그 큰 뜻은 사람의 생리란 직(直)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직이란 천지생생(天地生生)의 이치로 곧 인(仁)이다. 세상이 그릇되고 풍속이 점점 박해짐에 따라 인간들이 병고에 시달려 상하게 되고 그중 혹간 직없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요행으로 면한 것이니 그것은 수(數)로 칠 것도 되지 못한다. 그 직(直)과 그 진리를 잘 보전하여 인자수(仁者壽)의 보(報)를 받은 분이 계시니 증좌찬성 신공이 곧 그분이다. 공의 휘는 중엄(仲淹)이요 자는 희범(希范)이며 경상도 고령에서 갈려 나왔다. 시조 성용(成用)은 고려조에서 군기감(軍器監) 벼슬을 하셨고 그 후세에 연이어 명문(名聞) 있는 분이 많았으니 휘 장(檣)에 이르러 공조..
신도비의 건립시기는 단기4288년(서기 1955년)에 후손들의 의해서 세워졌다. 구사리 마을입구 솔숲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구사리는 낙안오씨 집성촌으로 석성군 오연의 후손들로 누대를 이어 정착하여 거주한 곳이다.또한 열망골과 오룡동은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안오씨의 낙안(樂安)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승주군(昇州郡)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시대의 분차군(分嵯郡 : 分 郡이라고도 한다)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분령군(分嶺郡)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낙안군으로 개칭하여 나주(羅州)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도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고 군으로 승격하기도 하였느데, 선조 때 군(郡)이 되었다가 190..
문의면 구룡리 구사리마을에 있는 기자석입니다.구사리 마을은 낙안오씨들의 집성촌입니다. 마을초입에 자리한 낙안군 오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옆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아직도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주는지 사람들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구사리는 석성군 오사룡의 후손들이 누대로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그 밑에 동네인 구룡리에는 경주최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자석을 세우고 그 주위로 막돌등을 이용하여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동리주민들의 치성터로 알려져 있습니다.방문한 날도 한지에 밤,대추등의 제물과 함께 무병장수의 상징인 실타래와 함께 양초등이 있었습니다. 또는 남근숭배(男根崇拜) 로 남근처럼 생긴 돌이나 나무 따위의 자연물이나 남근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 생산의 신(神), 개운(開運)의 신으로 믿고 받드는 원..
가덕면 노동2리 갈현마을 입구에 있는 선돌입니다.정월대보름 동제의 대상으로 마을중앙에 있는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주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갈골마을을 찾은 날도 바람만이 휑하니 불고 인적은 없고 젊은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점점 공동화 되어가는 농촌의 현실이 피부에 와 닿습니다. 그래도 선돌은 머리에 띠두르고 정갈한 황토흙 대접받았으니 그나마 다행인듯 합니다. 마을의 안녕과 함께 동리민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간난한 세월 동행해주는 친구노릇을 하는것 같습니다. 선돌은 한 쌍으로 반대편 마을에도 1기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