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공산성 선정비
- 법주사
- 현충시설
- 단지주혈
- 충주박물관
- 곡산연씨
- 각연사
- 청풍문화재단지 비석
- 공주박물관
- 문경새재
- 화양구곡
- 상당산성
- 효자각
- 문의문화재단지
- 선돌
- 충북의 문화재
- 청풍문화재단지
- 국립청주박물관
- 효자문
- 밀양박씨
- 경주김씨
- 부여박물관
- 부도
- 사과과수원
- 외사리 당간지주
- 화양동 암각자
- 보성오씨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청주박물관
- 사인암
- Today
- Total
목록통합청주시 (1571)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원구 북이면 호명리 동리입구에 있는 인동장문 충효각입니다.호명리는 본래 청주군 산외이면 지역으로 예전에서부터 호랑이가 울고 다녔다는 설이 있으나 그 사실 여부는 희미하고 주변 큰 산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말이 있다. 특히 삼보산은 그 앞이 마을 뒤가 되는데, 인동 장씨 중시조의 산소를 모신 산 형국이 범의 얼굴 형상을 띠어 그 산형을 따서 호오리라 이름 지어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이면에 편입되었다. 동은 증평읍 원평리이고, 서는 선암리, 남은 숙정리, 북은 증평읍 남하리에 접해 있다. 호명리의 자연마을은 양달말, 음달말, 새태말이 있다. 북이면 호명리에 있는 이 충효각은 1935년에 장경달(張慶達)의 충절과 장문창(張文昌)․장순급(張舜汲)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
김원효자각은 확실한 이유는 알수 없지만 청원군 수대리에 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그 이유로는 지금도 많은 정보에는 김원의 효자각은 수대리로 표기되여 있기 때문이다.청주와 청원군이 통합된 통합청주시 문화유적 비지정문화재 효자문편에도 아직도 남이면 수대리로 적혀있으니 말이다.북이면의 김원의 효자각을 다녀온지가 햇수로 4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정보가 수정되지 않고 있으니 이게 뭐하는 일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문화재를 담당하시는 분들은 현지 답사도 한번 없이 그냥 표기를 하나보다. 이 효자각은 조선 효종 6년(1665)에 내자사정(內資寺正) 오교(午橋) 연안인(延安人) 김원(金瑗, 1568~1636)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지금의 효자각은 1955년에 중건하고 1986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간 측면 1간..
【번역문】 시조태위공신도비명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부자가 있게 되어 있고 부자가 있어서 낳고 또 낳아 연속하여 감으로 천만 년이라도 세대를 이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연대가 아득히 멀어지고 서자(書字)로써 기록된 증거가 없으면 하는 수 없이 들은대로 본대로 그 세대일을 기술하는 것도 또한 자연스러운 사세이다. 우리나라 대성(大姓)에는 반드시 한씨(韓氏)를 지칭하게 된다. 은태사(殷太師, 기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그 후손 중에 성을 얻은 자가 3인인데 한씨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후 천수만 년을 지나 태위공(太尉公) 때에 이르러서 비로서 호서지구인 청주에 정착하셨으니 이 어른이 바로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시조가 되시니 대체로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말과 고적을 살펴 보아서 확연히 알 수가 있는 바이다. 부..
가덕면 청룡리 사지에 남아 있는 폐석탑으로 각부가 많이 결실되고 파손이 심한 편이다. 사지였던 민가 앞마당에 유존하며 현재 2개의 옥신석과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조성시기는 고려 말로 추정되며 현재의 높이 80㎝이다. 2층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가 표현되지 않았으며 폭이 매우 좁고 초층 옥신석과 비례가 맞지 않아 제짝이 아닌 듯하다. 2층 옥개석도 체감이 급격히 줄어 역시 초층 옥개석과 비례가 맞지 않으며 층급받침은 3단을 이루었다. 이로 보아 중간에 3층정도의 탑신부가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相輪部)는 후에 다른 석재들을 올려놓은 것으로 석탑부재가 아니다. 조성시대는 각부의 조각수법이 퇴화한 점으로 봐 고려말로 추정된다. 탑의 규모는 전체높이 80cm, 초층옥개석폭 45cm이다. 청용리사지는..
1677년(숙종 3)에 동부주부를 지낸 백석정 신교(白石亭 申灚)가 낭성면 관정리 지담가 바위 위에 세운 정자이다. 1927년 문중에서 중건하고 1987년 보수한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에 쪽마루를 깔고 통난간을 둘렀다. 현재 백석정에는 편액이 두 개만 걸려 있고, 많은 기문과 제영은 고령 신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亭於白石 因以名亭 吾從叔所手刱 從叔少也 負奇氣 有萬里心 俄而倦於世 還四方 事如少游 盖嘗取叱咤者 而溺其竅爲嘯歌 回其駕長風破巨浪者 而理漁釣行募地 得墨之左白石 石臨溪陡 起四五丈 北去沙灘 三百武而近 南望石峰 二里而遙 雖谺側而騁眺遠 後有太古松 輕涼逼而淸陰森然 遂鑿山而通逕 就石上 架而爲亭以綰之 其左爲燠室二楹 不易月而翼然 龍頭簇椽 獅背負檻 丹雘耀日 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