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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낭성면 관정리에 있는 묵정사는 1971년에 신덕린(申德隣), 신포시(申包翅), 신장(申檣), 신식(申湜), 신용(申涌), 신집(申潗)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육현사(六賢祠)라는 편액을 걸었고, 마당 앞에 사제문(思齊門)이라는 현판을 내걸은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이맛돌에는 묵정사원(墨井祠院)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신집은 조선 전기의 효자입니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종산(種山)이다. 문과에 급제한 이듬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갔다가 청요직을 거쳐 감사를 역임한 신용(申涌)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신득치(申得治)이다. 1684년(숙종 10) ..
강릉김씨 오효비는 괴서당말 마을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이 곳은 경헌정사라 불리우던 서당이 있던 곳으로 1930년경 일제강점기 시절 에는 노현학술강습소가 있어 초급과정의 교육을 가르키던 곳입니다.현재 마을회관과 오효비가 있는 동네이며 강릉김씨의 집성촌입니다. 강릉김씨오효비는 강릉김문가에서 배출된 효자와 충신등 다섯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관의 협조하에 강릉김문에서 세웠습니다. 오효자(五孝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성태는 1828년에 조봉대부,동몽교관에 증직되었습니다 김추진은 1833년에 조봉대부,동몽교관에 증직되었습니다. 김계홍은 통덕랑으로 1891년에 효자정려를 받았습니다. 김학룡은 장사랑으로 1857년에 청주영읍에서 포양하였습니다. 김병위는 1878년에 청주영읍에서 포양하였습니다. 강릉김씨..
낭성면 관정리에 있는 보한재 신숙주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묵정영당입니다. 야트막한 돌담을 쌓았으며 보수한지가 얼마 안되었는지 주위도 청결하니 관리가 잘되고 있습니다. 편의 시설로 주차장도 갖추어져 있고 주위로는 신중엄신도비와 함께 묵정서원등 고령신씨가문의 여러 유적들을 볼수가 있습니다. 신숙주 - Daum 백과 신숙주 신숙주(申叔舟, 1417~75)는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다. 사육신의 충절이 빛을 더하면 더할수록 그는 반비례로 변절자 · 겁쟁이 또는 시세를 추종한 자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그가 100.daum.net
증좌찬성고령신공중엄신도비명 고금을 통하여 수(壽)의 원리를 말씀한 중에 공자같은 분이 없었으니 그 큰 뜻은 사람의 생리란 직(直)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직이란 천지생생(天地生生)의 이치로 곧 인(仁)이다. 세상이 그릇되고 풍속이 점점 박해짐에 따라 인간들이 병고에 시달려 상하게 되고 그중 혹간 직없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요행으로 면한 것이니 그것은 수(數)로 칠 것도 되지 못한다. 그 직(直)과 그 진리를 잘 보전하여 인자수(仁者壽)의 보(報)를 받은 분이 계시니 증좌찬성 신공이 곧 그분이다. 공의 휘는 중엄(仲淹)이요 자는 희범(希范)이며 경상도 고령에서 갈려 나왔다. 시조 성용(成用)은 고려조에서 군기감(軍器監) 벼슬을 하셨고 그 후세에 연이어 명문(名聞) 있는 분이 많았으니 휘 장(檣)에 이르러 공조..
신도비의 건립시기는 단기4288년(서기 1955년)에 후손들의 의해서 세워졌다. 구사리 마을입구 솔숲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구사리는 낙안오씨 집성촌으로 석성군 오연의 후손들로 누대를 이어 정착하여 거주한 곳이다.또한 열망골과 오룡동은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안오씨의 낙안(樂安)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승주군(昇州郡)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시대의 분차군(分嵯郡 : 分 郡이라고도 한다)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분령군(分嶺郡)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낙안군으로 개칭하여 나주(羅州)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도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고 군으로 승격하기도 하였느데, 선조 때 군(郡)이 되었다가 190..
문의면 구룡리 구사리마을에 있는 기자석입니다.구사리 마을은 낙안오씨들의 집성촌입니다. 마을초입에 자리한 낙안군 오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옆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아직도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주는지 사람들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구사리는 석성군 오사룡의 후손들이 누대로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그 밑에 동네인 구룡리에는 경주최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자석을 세우고 그 주위로 막돌등을 이용하여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동리주민들의 치성터로 알려져 있습니다.방문한 날도 한지에 밤,대추등의 제물과 함께 무병장수의 상징인 실타래와 함께 양초등이 있었습니다. 또는 남근숭배(男根崇拜) 로 남근처럼 생긴 돌이나 나무 따위의 자연물이나 남근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 생산의 신(神), 개운(開運)의 신으로 믿고 받드는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