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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문화재 (273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月精寺)의 말사. 건립초기에는 보현산사 지장선원(普賢山寺 地藏禪院)이다. 일반적으로 산명을 사명으로 쓰면서 또 다른 사명을 쓰기도 한다. 즉, 산의 이름이 보현산이므로 보현산사라 하고 사명은 지장선원이라 하였다. 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국사(梵日國師)의 법(法)을 이은 낭원대사(朗圓大師)에 의해 개산된 사찰이다. 굴산산문의 개산조이고 낭원대사의 스승인 범일국사가 889년에 입적하자 부도와 비석을 세우고는 민규 알찬의 지원 아래 보현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보현사의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적어도 범일국사가 입적하는 889년에서 924년 사이에는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릉시 성산면 보현길 396[보광리 산 544번지]에 위치하고 ..
보현사 대웅전 앞에 있는 석텁부재입니다. 옆에는 마모된 석사자상이 있습니다. 강원도 강릉시의 보현사 내에 있는 3층 석탑 부재. 보현사 대웅전 앞에 있다. 탑재는 연화문이 조각된 사각방형의 석등 하대석 부재 위에 놓여 있다. 탑신석은 좌상인 사방불이 모각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1층 탑신석이 확실하고, 위의 지붕돌[옥개석]은 탑신석의 폭과 최하단의 지붕 받침 너비의 비율, 남아 있는 지붕돌 2점의 체감율을 계산하면 1층 지붕돌이 확실하다. 지붕돌 사이에 있는 부재는 노반석이 거꾸로 끼워져 탑신석처럼 사용되고 있으며, 위층의 지붕돌은 윗면에 찰주공이 있으므로 3층 지붕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장 위에 놓인 부재는 복발로 반이 갈라진 상태이다. 지붕돌은 전각부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파..
진천 향토자료전시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월성리 석조여래입상입니다. 이 불상은 진천군 광혜원면 월성리 산 2번지 광흥사 경내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이다. 본래 만승면 광혜원리 451번지 광혜원리 절터에 있었으나 1984년 지금의 광흥사로 이전되어 봉안된 것이다. 2020년 광흥사가 폐사가 되면서 이 곳으로 이전되었습니다. 광혜원리 절터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grandculture.net) 광혜원리 절터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 광혜원리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 [변천] 광혜원리 절터와 관련한 문헌 기록이 전하지 않아 사찰의 이름이나 내력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도로 확장 공 jincheon.grandculture.net 광흥사 석조여래좌상은 화강암..
회인면 쌍암2리 능암에 있는 동래정씨의 재실인 낙진각입니다. 마을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방문하는 날은 대문이 잠겨있어 안을 살펴볼수가 없었습니다.기와지붕이며 세멘블럭담으로 둘렀습니다. 낙진각樂眞閣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 창룡사에 있는 고려 전기 청석탑. 창룡사는 충주시 직동에 소재하고 있는 사찰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시기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후 고려 말 선각왕사 혜근이 중수하였으며, 조선 후기 서산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범우고(梵宇攷)』를 비롯한 조선 후기 기록에 창룡사가 전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법등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70년경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창룡사 등을 헐어 불타 없어진 충주 관아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1984년 충주 관아 건물을 중수할 때 명문 기와를 통하여 확인되기도 했다. 창룡사 다층 청석탑은 앞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창룡사..
이원면은 본래 신라초에는 소리산현(所利山縣)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16년(757년) 이산현이라 고쳐 부르고 관성군(管城郡) 소속케 하였다.고려 현종 9년(1018년)에 경상도 경산부(성주)에 소속 시켰다가 충선왕 5년(1313년) 옥주(沃州)에 소속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 지방행정제도 일제 개편 때 이산현(利山縣)이 폐현되고, 이남면(利南面)과 이내면(利內面)으로 분할되었다.1739년에 발행한 여지도서에는 이남면을 평산리를 비롯한 9개리 619호에서 15세이상 2,687명이 살았으며, 이내면은 현리를 비롯한 8개리에 455호에서 15세이상 1,910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이산현의 안쪽이 되므로 이내면이라 하여 9개리를 관할하였다. 1910년 일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