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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문화재 (273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1394년(태조 3)에 하첨(河詹)이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황학루(黃鶴樓)를 세우고, 현(縣)의 뒷산에 창건하였다. 그 후 1666년(현종 7)에 토성(土城) 안으로 이건하였고, 1752년, 1755년, 1901년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1872년(고종 9)에는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5칸의 명륜당,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초석이 연화문(蓮花文)으로 조각된 것으로 보아, 사원건축양식과 정자·주택 건축양식이 절충된 것으로 보인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남이면 문동리 동화사앞 개울에 자리하고 있는 거북바위입니다. 바위의 모습이 거북이를 닮아 거북바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거북바위위에 지금 대적광전에 안치한 비로불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북동 경주김씨 감사공파묘역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인 김벽의 묘지입니다 묘지앞에 자리한 비석에는 사도사첨정경주김공휘벽지묘(司導寺僉正慶州金公諱鼊之墓)라고 음기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도사라는 관청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궁내 창고의 미곡과 궁내용의 장따위의 물건의 공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입니다.쉽게 말씀드리면, 궁중에서 사용되는 곡식과 장류(간장, 된장, 고추장 등)를 공급하는 관청입니다. 첨정이라는 벼슬은 종4품의 관직으로 정, 부정과 더불어 관청의 실무를 담당하는 관직입니다. 김벽의 아들인 김응탁 김응련 김응건은 선조23년 증광시에 진시시에 동반합격하였다.
소수서원내에 있는 화단에 전시된 숙수사지 출토유물입니다. 숙수사지(宿水寺址)의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조선 초기에 폐사되고 1542년(중종 37) 소수서원이 건립되었다. 지금의 영주 소수서원 일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과 관련된 유물과 유적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이 일대에 사찰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사찰이 숙수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출토된 불상들의 편년을 근거로 볼 때 삼국시대 사찰로 추정된다. 그 뒤 숙수사의 사적은 전하지 않으나 고려 후기의 학자인 안향(安珦)[1243~1306]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안향의 아들과 손자까지 숙수사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고려 후기까지는 숙..
순흥안씨 열녀문은 연진행의 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하여 1936년에 세운 정문이다. 정열부인 순흥안씨는 절충장군 연진행의 부인으로 곡산부원군 연사종의 7대손이다. 부인은 효성이 지극하여 남편을 잘받들었다. 인조14년(1636년)병자호란때 가족과 피난중 다음해 정축년 설날에 제사를 지내는 중 적장이 침입하여 남편이 위급한 것을 보고 남편과 같이 적과 싸우다 적장에 칼에 죽었다. 적장은 조선여성의 열강에 감동하여 유혈로 벽에다 "열녀"라고 쓰고서 물러갔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열부인을 명하고 정문을 세웠으나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문이 쓰러지고 현판만 연씨종중에서 보전하다가 1986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문암리에 건립하였다. 정려앞 처머에는 열녀문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정려안에는 1987년에 연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