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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문화재 (2737)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옥천 대성사 석조 여래 입상은 돌기둥형 석불이다. 대성사가 있는 청성면 도장리(道場里)는'불당골(佛堂谷)'로도 불리는 것으로 보아 불교와 관련된 지역 임을 알 수 있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옥천 육씨 족보에도 "조선 성종 22년(1491년)에 대성사에 석불이 있었다.” 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입상은 높이가 360cm이며, 가운데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 머리에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고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식으로 법의를입고 있으며, 맨 아래에는 발의 모습도 확인된다. 왼손 가운데에 홈이 있는 것 등으로 보아 지물(持物)을 받쳐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둥근 관모 형식을 쓴 형태는 서울 약사사 석불 입상(1490) 등과 유사하며, 예산 삽교 석조 보살 입상과 같이 두 개의 돌기..
만명리晩明里는 장수리의 동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궁촌리, 남쪽과 서쪽은 무회리 남 부, 북쪽은 보청천을 경계로 산계3리 계하와 안임이와 접한다. 만명리는 만밍이, 마명으로 부른다. 마을 앞을 보청천이 동쪽에서 유입하여 마을을 지나쳐 서쪽으로 흐르는데 장 마철에 거대한 보청천 물길이 안임이 절벽에 부딪히며 바위 협곡을 울리는 소리가 마치 말의 울음처럼 들려서 ‘말 밍이
손대창(孫大昌, 1752년 영조 28~?)은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1752년(영조 28) 군북면 막지리莫只里 장고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다. 숙종·영조 때의 명현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제자로 학식과 덕망이 고명하여 유림의 추앙을 받았 으나, 부모 봉양을 위하여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어려서 스승 송명흠에게서 공부를 할 때, 다른 학생들은 모두 시원한 그늘에서 책을 읽었지만 그는 뙤약볕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스승이 그 까닭을 물으니 부모님 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일하고 계신데 자식 된 도리로 시원한 그늘에서 책을 읽을 수 없다 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하..
한벌리는 마을이 큰 벌판이므로 한벌이라 하였다. 본래 음성군 동도면(東道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한상리(閑上里)와 한하리(閑下里)를 병합하여 한벌리가 되었다. 1956년 7월 8일 음성면이 음성읍으로 승격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에 있는 일제강점기 박갑동의 치적을 기리는 비. 박갑동 시혜비는 일제강점기인 소화15년 (1940년)에 세워진 비(碑)로서, 박갑동은 농민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빌려주고 소작료를 적게 받거나 면제해 주는 등의 자선 사업을 한 인물이다. 비석 앞면에는 ‘유학박갑동시혜비(幼學朴甲東施惠碑)’라고 쓰여 있으며, “우리에게 토지를 베풀어 자애스런 말로 농사짓게 하였고, 수입을 면제하였으니 자선으로 생업을 삼았다네(我播土地 愛言小作 免除收入 慈善爲業)”라고 쓴 ..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신복사는 통일신라 문성왕 12년(850년)에 범일국사가 처음 세웠다.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표현하였는데,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 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며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원통형의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는 얼굴은 풍만한데다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 복스럽게 보인다. 관 밑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걸쳐 내져진 옷자락은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보살상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팔찌, 목걸이, 옷주름은 굵은 띠처럼 묘사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둥글고 둔중한 조각수법을 보인다. 이러한 자세나 조각 솜씨는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국보)..
고천사는 조선 말기에 성종대왕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으로 책록되고 고천군(高川君)에 봉해진 이조판서(吏曹判書) 신정(申瀞, 1442∼1482)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사당으로 일명 "청룡사(靑龍祠)"라 하였다. 후에 화재를 당하여 폐사되었다가 1959년에 다시 세우고 매년 3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59년에 중건한 건물로 정면3간, 측면 1간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고 유리창 미닫이를 달았으며 "고천군사당(高川君祠堂)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마당 앞으로 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현재 고령 신씨(高靈申氏)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고천군 신정(申瀞)은 조선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