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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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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휘(諱)는 지계(知誡)이고 자(字)는 인지(仁之)이며 호는 잠야(潛冶)이다. 박씨(朴氏)는 모두 신라(新羅)의 후손인데, 선생의 선조(先祖)는 함양(咸陽) 사람이다. 먼 윗대 선조 증(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사(樞密院事) 박신청(朴信淸)이란 분은 고려(高麗) 때 저명하였고 우리 태종조(太宗朝)에 이르러 박습(朴習)이란 분은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모함을 받아 죽었는데, 이분이 선생의 6대조이다. 증조 박중검(朴仲儉)은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할아버지 소요당(逍遙堂) 박세무(朴世茂)는 문과 출신으로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의 벼슬을 추증받았으며 학문과 지조로 명종조(明宗朝)의 명신(名臣)이 되었고 괴산(槐山) 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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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면 시동리에 있는 손씨재실입니다. 원래의 위치는 시동리 마을에 있었지만 후손들에 의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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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지경리 지경삼거리에 위치한 번남인 박근양의 구휼송덕비이다 비의 건립시기는 비의 상태등으로 보아 계미년(1943년)으로 추정된다. 비의 전면에는 거사박공근양구휼송덕비(居士朴公根陽救恤頌德碑)라고 음각되여 있다. 괴산에서 당시 동일양조장을 경영하여 축적된 경제력으로 지역을 위한 여러가지일에 앞장서며 교육사업및 빈곤퇴치를 위한 구휼사업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박근양이 동네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구휼하였다는 내용이 비석에 음각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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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면에 속한 신기리는 승주산 아래의 한적한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가나무정, 탑골 등이 있다. 가나무정은 가정이라고도 부르는 신기리의 원마을로 옛날 정자같은 가나무(노나무)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탑골은 고려시대 절탑이 승주골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새로 터를 잡아 이룬 마을이라 하여 신기라는 명칭이 생겼다. 탑골마을은 신기2구에 속한다. 탑골이라는 명칭은 동네에 위치한 삼층석탑에서 유래되었다. 석탑은 도난당하였으며 몸돌 하나를 이용하여 다시 탑을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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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리 3층석탑은 문법리 전법마을의 옛 사지에 있는데 석탑주변은 경지와 마을로 바뀌어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석탑은 전체높이 224cm에 이르나 기단부와 3층까지만 남아 있고 노반석(露盤石) 윗부분은 결실되었는데 노반석 위에 머리부분이 파손된 작은 파불(破佛) 1구를 올려놓았다. 현재 탑이 서 있는 위치가 경지 옆 둑 사이에 위치해 지반이 약하여 도괴를 우려한 주민들에 의해 기단부 일부가 콘크리트로 고정되어 있어 지대석은 확인되지 않는다. 기단중석(基壇中石)은 4매의 판석을 각 면에 1매씩 배치하여 짜 맞추어 조성하고, 기단상석 윗 부분에는 1단의 탑신받침을 각출(刻出)하였다. 1층·3층 탑신에는 우주(隅柱)를 모각(模刻)하였으나 2층 탑신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다. 초층·2층 옥개석에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