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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낭성면 갈산리 갈산사앞에 자리하고 있는 보성인 오익환의 유허비입니다.
신직휴는 고령인으로 1873년 진사 신진구의 아들로 호정리에서 출생하였다. 산내면이 낭성면으로 개편될 때 공은 당신의 사랑채인 과필헌을 사무실로 선뜻 내놓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마을일에 열심을 내었다. 그 후 면장으로 추천을 바닸으나 공은 한 때 때가 아니디 하고 거절의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국민이 현명하고 경제가 자립된다면 국권회복도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굳은 신념으로 면장취임을 승낙하였다. 공은 면장에 취임하여 농사개량과 생활개선에 힘쓰는 한편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통수단이 앞서야 된다는 판단을 하고 좁은길을 신작로로 넓히고 하천정비등으로 장마철의 고질적인 장마피해를 줄이며 산비탈을 깍아서 새길을 만들었다. 1928년에는 낭성면에 보통학교가 창설될 때 자신의 안채와 사랑채..
낭성면은 본래 청주시 산내이하면으로 조선 영조후반(1750∼1776) 월오동, 한시동, 태봉, 갈산, 죽동, 안건, 현암, 신대, 호평, 신기, 동문내, 동문외, 창리,봉조암, 관대, 원동, 추동, 거지치, 선동, 무쌍동, 나복동등 23개리 동리를 관할 하고 있다. 정조 22년(1798년)경에는 상월오동, 하월오동, 한시동, 원동, 추동, 거지치, 선동, 무쌍동, 나복곡, 태봉, 태봉산정, 갈산, 장성, 안건, 산직, 소암, 송정, 안인동, 노계, 양성, 호평 신기, 동문외, 동문내, 창리, 수문외, 신촌, 음지, 마당, 낙천, 입암, 산하리등 32개리로 확대개편 하였고 헌종대(1845년경)에는 통합되어 16개동리로 축소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에는 29개 동리를 관할하였으나 1914년 군면발합에..
청석굴은 미원남쪽으로 약 시오리 떨어진 국도옆에 있는 동굴유적으로 상당산에서 발원한 호정천과 구녀산으로 흘러내린 미원천이 낭성산 밑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보은쪽에서 흘러온 속리천이 다시 합쳐져서 청천으로 꺽여 한강의 한 지류를 이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이 곳 청석굴은 구석기 인간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삼기에 적합한 환경이며 찍개와 볼록날 긁개가 발견된 바 있다. 실로스톤 자갈돌로 만든 찍개는 원석의 엇갈립떼기 수법으로 쌍날의 옆 찍개를 만들어 썻으나 날이 무뎌지자 다시 인접한 능선의 같은 방법으로 쌍날의 긴 찍개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청석굴에는 황금박쥐가 살고 있다고 하여 황금날개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개천을 거로지르는 다리도 만들어 놓았으며 자동차 주차장 화장실등 편의시설을 갖추어 놓았습..
초계변씨(1877~1939)는 평강인 전재우에게 시집와 부도를 지키며 길쌈으로 가업을 삼았다. 또한 시부모를 극진히 섬기고 남편을 공경으로서 받들었다. 시아버지가 병을 얻어 자리를 보존하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달여서 올렸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의로서 삼년상을 모셨다. 그 후 시어머니가 병이 들어 5년간을 머리를 빗기며 의복과 이불을 빨아 입히고 덮어 주었다. 상을 당하자 시아버지 때와 같게 하였다.불행이 겹쳐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오랫동안 병석에 눕자 밤낮으로 옆에서 수발을 들었으며 밤이면 북두칠성에게 기도하고 아침이면 초정약수를 길어다 미음을 끓여 간호하였다. 남편이 죽은후에도 자식들을 잘 키워 의로운 방향으로 교육을 시켰다.비석은 1975년에 세웠다. 비석의 전면에는 절효부초계변..
박봉임은 상주인 박용직의 딸로 인천인 채제홍의 부인이다. 남편이 20세에 일본으로 떠나간 뒤 극심힌 생활고에 4개면에 다니면서 일하여 시부모를 공경하였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가 노환으로 85세에 세상을 뜨자 그 애통함이 보는이를 놀라게 하였다. 초종례를 예를 맞추어 모셨다. 그 후 시어머니께서 노망이 들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자 자신도 70노경으로 매일 2-3회씩 시어머니 청결세탁을 담당하였다. 시어머니가 87세로 세상을 뜨자 초중례를 시아버지 때와 같게 하였다.비석은 단기 4308(서기 1975)년 을유년에 세웠다. 비석의 정면에는 효부박봉임기적비(孝婦朴鳳姙記蹟碑)라고 음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