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단지주혈
- 법주사
- 화양동 암각자
- 선돌
- 경주김씨
- 외사리 당간지주
- 효자각
- 문경새재
- 보성오씨
- 공산성 선정비
- 사과과수원
- 청풍문화재단지
- 상당산성
- 밀양박씨
- 문의문화재단지
- 충주박물관
- 사인암
- 곡산연씨
- 청풍문화재단지 비석
- 충북의 문화재
- 효자문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현충시설
- 각연사
- 공주박물관
- 화양구곡
- 부도
- 청주박물관
- 부여박물관
- 국립청주박물관
- Today
- Total
목록2022/03 (3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2006년 1월31일에 새로 세운 석장승입니다.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마을의 안녕을 빌고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빌며 일종의 액막이 개념의 장승입니다. 원래는 목장승이 있었지만 2006년 마을주민 일동의 이름으로 권성중이 장승을 기증하여 마을어귀에 세워놓았습니다.
신유효자문에 대하여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대장리에 있는 조선 후기 신유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입니다. 조선은 유교를 국교시하였기에 효(孝)와 충(忠)과 열(烈)을 중히 여겨 정려를 특히 많이 세웠다. 신유의 효자각도 근방의 사람들을 교화하는 차원에서 신유가 살던 마을에 세운 것이다. 신유의 효자각은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대장리의 남쪽 끝부분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충북선 소이역의 앞쪽이며 한라중공업의 뒤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신유는 효자로 자는 이장(而張),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신상민(申尙閔)의 아들이다. 신유는 아버지가 병환이 들자 낚시를 하여 아버지를 봉양하였으며 산과 들을 다니면 약초를 캐어 약을 달여 드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이 나자 그 형제가 부친..
소이면 대장리 사거리에 있는 대장리구장을 지낸 신학철의 불망비이다. 신학철은 대장리 구장을 18여년간 탈 없이 잘 수행하였기에 주민들이 뜻을 모아세웠다. 비석의 내용을 보면 구장의 임무를 맡김에 일의처리는 제법도를 따랐고 옛일을 참작하고 새로운 일을 함에 편벽되게 하지 않았으며 공과 사의 일은 중립을 지킴에 모든 주민들이 칭찬하였다.십팔년간 업무를 행함에 시작과 끝이 하나같았다. 1936년 6월에 새긴 비석은 신집효자각옆에 자리하고 있다.현재 비석은 1986년 12월에 새로 만들어 세웠다.
이 정려각(旌閭閣)은 열녀 석천순(石川栒)의 처 연안이씨의 정려로 조선 인조(仁祖) 15년(1637)에 세운 것이다. 연안이씨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남편이 청나라 병사들에게 잡혀가 죽고 또 이씨를 난행하려하자 자결하였다. 그 후 그의 원혼이 연풍현감의 꿈에 나타나자 현감이 이 사실을 알고 이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전한다. 한편 연풍 구읍지의 기록에는 석천순의 처가 병자호란 때 청병에 화를 입어 자살한 사실을 임금께서 알아 정려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녀각 안에는 1927년 이범식(李範植)이 개각(改刻)한 「烈女李氏之閭」 “謹按邑誌 有乃延安李氏 丙子亂 爲夫君而死 天地共動 山川含悲 事聞汪閭于此 以倡善而觀感 自多更揚之 而石裔褒彰也”라 쓴 편액이 있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오세양은 인후의 증손이고 천령의 아들로 봉열대부예빈사판관을 지냈다. 비석에는 봉열대부예빈사판관보성오공휘세양지묘배영인진주강씨쌍구(奉列大夫禮賓寺判官寶城吳公諱世暘之墓配令人晋州姜氏㕠㐀)라고 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