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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2/10 (54)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왕자사부(王子師傅)는 조선시대 왕자의 교육을 맡았던 종9품 관직이다.권설직(權設職)으로, 1785년(정조 9)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명문화 됨으로써 임시로 증치된 관직이다. 품계는 종9품으로 사과 이하의 체아록(遞兒祿)을 받았다. 대군사부(大君師傅)·왕손교부(王孫敎傅)·내시교관(內侍敎官) 등의 권설직은 재직기간 900일이 지나면 6품관으로 승급되었다. 괴산군 청천에 있는 우암선생의 묘소를 찾았다가 우암선생 묘밑에 있는 다른 묘소를 보게 되었는데 근간에 세운비석이 있는 묘소입니다. 문인석과 망주석을 갖추었으며 근간에 세운 비석에는 송자현손왕자사부부군(宋子玄孫 王子師傅府君)이라고 각자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우암선생의 현손중 왕자사부의 직책에 있었던 자신의 조상을 나타내기 위한 비석으로 추정됩니다. 원래의..
도원리는 본래 청주군 청천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廢合)(廢合)에 다라 어룡리(漁龍里), 중리(中里), 강정리(江亭里)를 병합(倂合)하여 도원리(桃源里)라 이름하고 괴산군 청천면에 편입(編入)되었다. 원도원리 마을회관옆에 도원리짚풀공예전시장 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습니다. 짚풀공예전시장은 원래 도원리의 마을회관 이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마을회관을 신축하면서 구 마을회관은 짚풀공예전시장으로 활용되는 것 같습니다. 짚풀공예전시장 벽에 있는 당시 마을회관을 지을 때 힘을 쓴 마을이장 이었던 석덕우의 공로패가 있습니다. 공로패는 1989년 5월 원도원주민일동의 이름으로 공로패를 새겨서 벽에 삽입하여 놓았습니다. 공로패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로패 / 석덕우 귀하는 원도원리 이장으..
진천 덕산면 두촌리 상산재앞에 자리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품종은 느티나무이며 수령은 지정당시(2015년 05월21일) 300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진천군나무 제 4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진천송씨 대종회에서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충절수(忠節樹)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있습니다. 우국충혼을 홀로 기리며 조선 순조 때부터 3백년을 꿋꿋이 지켜온 진천의 이 느티나무는 충절수라 불린다. 나라사랑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이요, 자신의 한계를 넘어 의리를 지키는 것이 절조라는 의미로 이는 진천군의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여기 진천백 송인장군의 유택 우백호 끝자락에서 진천송씨 시조의 충절을 기리니 고려 이자겸의 난 때 인종 임금을 몸을 바쳐 호위하다가 순절하였다.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성삼문 등 사육신과 ..
이대건과 이시발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는 쌍오비각이 자리한 용정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용소(龍沼)의 ‘용(龍)’자와 쌍오정(双悟亭)의 ‘정(亭)’자를 따서 용정리(龍亭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진천군 초평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양촌리·지전리·부창리·생석리·연촌리를 병합하여 용정리라 하고 초평면에 편입하였다. ] 동남쪽으로 두타산(頭陀山)[598m]이 솟아 있고, 초평천(草坪川)이 마을 중앙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초평저수지로 흘러든다. 기후가 온난하고 수량이 풍부하다. 진천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 생곡·부창·양촌·지전 등이 있으며, 국도 34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 증평군과 이어지고, 지방도 516호선이 동북 방향으로 뻗어..
진천향교는 교성리 향교마을 야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향교에서 바라다 보이는 진천시내의 모습입니다. 진천향교가 위치하고 있는 교성리는 조선 말기 진천군 남변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교동(校洞)·탑동(塔洞)·학당리(学堂里)를 병합하여 교성리(校成里)라 하고 군중면에 편입하였다. 1917년 군중면을 진천면으로 개칭하였고, 1973년 진천면이 진천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진천읍 교성리가 되었다. 진천향교 입구에 있는 비석군입니다. 진천향교와 관련된 공덕비와 진천향교 전교의 존성비입니다. 향교직원으로 향교의 보존과 더불어 항교유지에 힘쓴 향교직원 김해인 김만희의 공덕비입니다. 농림부장관을 지낸 정운갑의 공적비입니다. 진천향교 전교를 지낸 한성수의 존성비입니다.
진천 지역의 조선시대 건축물로는 조선 태조 때 건립된 진천향교가 있다. 대성전, 명륜당, 문묘인 동무와 서무로 이루어져 있다. 역대 현감이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 여러 차례 중수하였고, 1804년(순조 4) 지방의 유지 최흡이 사재를 들여 앞면 6칸 옆면 2칸의 풍화루를 세워 지금의 향교 모습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선 태조 때 진천현 관아 남쪽 2리인 교성리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려시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교육기관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재정비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풍화루는 1804년(순조 4) 지방의 유지 최흡이 사재를 들여 앞면 6칸 옆면 2칸의 풍화루를 세웠다. 향교를 방문한 날이 향교의 기와를 정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