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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백면 사양리 사양영당 뒤쪽의 돌출된 자연 암반 모습이다. 이 암반에 '사암(思菴)'이라는 각자가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사양리라는 지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맨 왼쪽의 청주이씨 사패비는 3단의 방형대석 위에 높이 145㎝, 너비 45㎝, 두께 22㎝의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지붕돌]을 얹었다. 청주이씨 사패비는 전면에 ‘청주이씨사패비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 서원부원군 청허당 휘 거이 시 문도공(淸州李氏賜牌碑 大匡輔國崇祿大夫左議政西原府院君淸虛堂諱居易謚文度公)’이라고 적혀 있다 맨 우측 새로 세운 청주이씨 사패비는 전면에 ‘청주이씨 사패비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서원부원군 청허당 휘 거이 시 문도공(淸州李氏賜牌碑 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西原 府院君淸虛堂諱居易謚文度公)’이라 적어놓았다. 후면에는 맨 좌측의 원 비문의 내용을 수록하였으며, ‘서기 일구칠육 병진시월일(西紀 一九七六 丙辰十月日)’이라고 건립일[1976년]을 적어놓았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

숭모재崇慕齋는 양성 이씨 이시중태망공파종중 사당, 1678년(숙종 4)에 효제孝悌 충신忠臣태망공台望公의 사우이다. 진천읍 행정리 산 20번지에 위치하고, 2006년에 건립되었으며,목조기와집이다. 양성이씨 19세휘태망공문중숭조당( 陽城李氏 19世諱台望公門中崇祖堂)이라는 비석이 있으며 납골묘를 조성하여 놓았습니다.

상모재常慕齋는 양성 이씨 교위공파 종중 사당이며, 이신백의 후손을 위한 사당이다. 진천읍 행정리 699-2번지에 위치하고, 2003년에 건립하였으며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상모재 마당에는 양성이씨와 관련된 여러 기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득곤은 1587년(선조 20) 지금의 진천읍 행정리(杏井里)[일명 살구우물]에서 태어났다. 옛적에 행정리 입구에는 살구나무가 있었고 그 살구나무 밑에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어서 살구우물 또는 살구물이라 불리었다. 살구우물마을 자랑비에는 마을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향기 좋은 살구나무 아래 큰 우물이 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의 식수는 물론이며 지나는 길손들의 휴식처였고, 특히 과거 시험 보러 갈 사람들이 이 우물..

진천읍 사석리 사충문옆에 자리한 보호수 입니다.진천-1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지정당시 수령은 약 190년 이며 수세는 양호합니다. 보호수 밑으로는 괴석(怪石)이 있습니다.그 중에서 특이한 괴석은 남성의 성기를 닮은 일종의 기자석이 있습니다.보호수 옆으로는 개울위로 정자를 지어 놓고 한세월을 보내던 정자건물이 있습니다.지금은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 퇴색하여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승종(李承宗)[1574~?]은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학자이자 효자입니다.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효백(孝伯), 호는 서암처사(西巖處士). 청허당(淸虛當) 이거이(李居易)의 8세손이다. 『청주이씨족보(淸州李氏族譜)』에 따르면 태사공 이능희(李能希) 이후에 본관을 청주로 정하였다고 한다.이승종(李承宗)[1574~?]은 지금의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행과 문장이 탁월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한 효도를 하였고, 제사를 받들 때 정성을 다하였으며, 자제들을 가르침에 법도가 있었고, 궁한 친척들을 구휼하여 주었으며 있고 없음을 따지지 아니하였다. 나라의 부름을 자주 받았으나 광해군 대의 어지러운 조정을 만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모 봉양에 최선을 다하고 상을 당해서는 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