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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문중서원의 성격을 지닌 청계서원은 1961년 이래로 약 20여 년간 봉계서원으로 불렸다. 서원의 건물은 사당·강당·고직사(庫直舍) 영역으로 크게 구분되며,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를 지닌다. 외삼문인 창제문을 들어서면 정면 6칸의 강당인 정교당이 정면에 나타나는데, 이 마당의 좌우측에는 비석을 2개 배치하였다. 강당의 좌측은 경덕사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강당의 우측은 정면 3칸의 고직사가 있고, 그 뒤로 내삼문인 혜민문(惠民門)을 지나면 다시 정면 3칸의 숭은사라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정문에 걸어 놓은 청계서원 현판과 숭은사 현판, 혜민문 현판은 모두 후손인 정창훈이 쓰고 제작하여 걸은 것이다. 이외에도 1961년에 후손 정순석(鄭順錫), 정태호(鄭台鎬), 정재화(鄭載華)가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 내에 있는 벽돌기단입니다.건축물의 기단부를 벽돌로 쌓은 것으로, 원래는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죽죽리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있는 진주성 내 박물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기단석 위에 일정 간격으로 높이 15㎝가량의 탱주(撐柱)를 세우고, 그 사이에 벽돌을 쌓은 다음 갑석을 덮었다. 사용된 벽돌은 장방형으로 길이 32㎝, 두께 7㎝ 내외이다. 벽돌은 가로로 눕혀서 쌓고 탱주와 접하는 곳은 반으로 잘라 사용하였다.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형태로서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하공진의 사적비.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하공진은 자신을 볼모로 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다. 하공진의 이와 같은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1969년에 하공진의 후손이 건립하였다. 방형의 대좌와 거북형태의 비좌가 한 돌로 되어 있고 비신 위의 비수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사방으로는 구름문양을 조각하였다. 고려 성종과 현종대의 충절신인 하공진의 사적을 널리 알리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특히 진주를 충절의 고장이라고 일컫는 데 하공진의 충절사적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무인년(戊寅年)4월에 성내토병건(城內土兵建)에 의하여 세워졌습니다. 병사 ***진휼토졸영세불망비(兵使 ***賑恤土卒永世不忘碑)하고 적혀있습니다.무인년이면 1758,1818,1878년으로 다시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진주와 관련이 있는 사람은 영조39년(1739년)에 김상신(金相紳)의 이름을 볼수 있다 김싱신은 이년후인 1741년에는 진주목사로 제수되어 진주와 인연을 맺게된다. 이것은 개인적인 추측임을 밝힌다.

승정원일기 2905책 (탈초본 134책) 고종 19년 10월 7일 경신 47/58 기사 1882년 光緖(淸/德宗) 8년 ·洪在倫·許璉爲五衛將, 方泰準爲景福將, 宣昌魯爲左捕從, 李章烈爲忠淸兵使, 李熙忠爲慶尙左兵使, 白南益爲慶尙右兵使, 金東奭爲廣州中軍, 吳有善爲惠山僉使, 金仁鎬爲全州營將, 守判中樞加設單沈履澤, 副護軍趙忠熙, 副司果鎭[兪]鎭沃·朴齊斌·徐誼淳·洪學周·林永相·尹榮植·朴齊臣·王俶說已上竝單付, 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單李元會, 黃海道兵馬節度使單鄭雲翼。 비석의 전면에는 병상국백공남익영세불망비(兵相國白公南益永世不忘碑)라고 적혀있다. 1882년 10월 경상우병사에 제수돼 진주에 왔으며, 1884년 4월까지 재임했다. 재임시 선정을 베푼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경상우도 암행어사 이헌영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