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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계형(季亨). 할아버지는 어영대장(御營大將) 이세선(李世選)이다. 무인 가문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봉산군수·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를 거쳐 1733년(영조 9)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에 발탁되었다. 그 해에 공납(貢納)을 마구 거두어 들인 것으로 말미암아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전임자의 소행으로 밝혀져 무마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장살된 영교(營校) 배수현(裵守賢)의 원수를 갚으려는 아내 자근례(者斤禮)의 습격을 받아 왼쪽 둔부에 상처를 입었다. 변방의 장수가 일개 아녀자에게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켜 엄하게 처벌하자는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파직에 그쳤다. 무인으로서의 뛰어난 재질과 병조판서 박문수(朴文秀) 등의 천거에 힘입어 곧 관직에..

진주성 비림에 자리하고 있다.비석의 전면이 박리되어 누구의 선정비인지는 알수가 없다,기해년(己亥年)10월에 향중립(鄕中立)이라 하여 마을주민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비신의 전면이 박락되어 누구의 비석인지는 알수가 없다. 끝에 보이는 낙고(落故)라는 명칭으로 보아 이신경 거사불망비에도 같은 낙고(落故)라는 비석을 새긴사람이 동일인으로 보아 그 시절의 사람으로 추측해 볼수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정유년(丁酉年 1723년)이다.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숙종 45년 12월 22일 경신 1719년 / 鄭道元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判官朴繼壽, 副護軍金洙·申光夏, 水原監牧官鄭治, 南兵使尹五商, 內禁衛將申光夏, 副摠管李鳳祥·東善君炳·張漢相, 副護軍李暉·洪處宙, 司直權尙游·兪命雄·尹憲柱·朴泰恒, 司果韓重熙, 副司果柳憲章·李相成·趙鳴謙·金濟謙·洪龍祚·朴弼正, 副司猛朴昌潤, 副司勇尹 , 副護軍韓信哲·權聖揆·權聖經, 司直兪集一·金演, 副司直李㙫, 司果權重經, 副 司果柳命雄·柳... 윤오상에 대하여는 자세한 기록을 알수가 없다.비석의 전면에는 병사윤공오상무휼유애비( 兵使尹公五商撫恤遺愛碑)라고 적혀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조선 중기 무신 이수일(李守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이수일[1554~1632]의 본관은 경주, 호는 은암(隱庵), 시호는 충무이다.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왜군 격퇴에 공을 세우고 1603년 진주성을 증축하는 등 1605년 길주목사로 갈 때까지 진주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수일이 진주병사 재임 중 병사를 사랑하며 선정을 베푼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1606년(선조 39)에 세운 유애비(遺愛碑)이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개석을 얹었다. 높이는 174㎝, 폭 83㎝, 두께 17㎝이다. 비의 제목은 ‘兵使兼牧使李公守一遺愛碑(병사겸목사이공수일유애비)’이다. 비문은 광해군 때의 학자 하수일(河受一)이 지었다. 1973년 경상남도..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병사(兵使) 이진경(李眞卿)의 선정을 기념하는 비. 경상우병사 이진경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1702년(숙종 28) 건립하였다.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내에 있다. 1973년 진주성 내 비석군(碑石群)으로 옮겨졌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높이 160㎝, 폭 71㎝, 두께 15㎝의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를 얹었다. 이수의 조각이 아주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비석은 풍화로 약간 마모되었지만 비문의 글씨는 알아볼 수 있다. 비의 제목은 “故兵使李公眞卿撫恤軍卒遺愛碑(고병사이공진경무휼군졸유애비)”로, 비문은 없고 이건(移建)에 관한 기록만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甲申 五月 日 曾孫昌肇按節統營移立碑石仍建碑閣 玄孫義豊按節此營敢此移立戊午(갑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