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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92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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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리 3층석탑은 문법리 전법마을의 옛 사지에 있는데 석탑주변은 경지와 마을로 바뀌어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석탑은 전체높이 224cm에 이르나 기단부와 3층까지만 남아 있고 노반석(露盤石) 윗부분은 결실되었는데 노반석 위에 머리부분이 파손된 작은 파불(破佛) 1구를 올려놓았다. 현재 탑이 서 있는 위치가 경지 옆 둑 사이에 위치해 지반이 약하여 도괴를 우려한 주민들에 의해 기단부 일부가 콘크리트로 고정되어 있어 지대석은 확인되지 않는다. 기단중석(基壇中石)은 4매의 판석을 각 면에 1매씩 배치하여 짜 맞추어 조성하고, 기단상석 윗 부분에는 1단의 탑신받침을 각출(刻出)하였다. 1층·3층 탑신에는 우주(隅柱)를 모각(模刻)하였으나 2층 탑신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다. 초층·2층 옥개석에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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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면 문법리 전법마을에 있는 삼층석탑 위에 있는 파불입니다.탑이 있는 이 곳 인근이 절터로 추정되며 지금은 탑과 파불외에는 절터흔적을 찾을수 없습니다.파불은 머리부분이 망실되어 없으며 작은 크기의 석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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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지경리 신대마을에 냇가에 경회정이라는 정자가 있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몇번이고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수가 없었다. 많은 자료를 접해 보았지만 정자의 모습을 볼수도 없고 나와는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경리에 위치한 안동인 김의신의 사적비를 살펴보다가 경애정 이명(異名)으로 사천정이라는 정자를 김의신이 황암천가에 건립했다는 내용을 볼수가 있었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본 결과 경회정은 지금은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있었다. 시간을 내어 지경리 황암천가에 자리한 경회정터를 찾아 보았다. 경준정은 청천면 지경리 신대마을의 동구 대로(大路)에서 약 100m 지점에 있다.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사천현감(泗川縣監)이 된 김의신(金義臣)이 조선 정조 7년에 건립하여 향당청소년(鄕堂靑少年)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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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청천면 지경리에 위치한 사천현감을 지낸 안동인 김의신의 사적비 입니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단기4332년(서기1999년) 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가선대부김의신사적비(嘉善大夫金義臣事蹟碑)라고 적혀 있으며 전후면으로는 김의신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석은 주막거리(地境)로 불리우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막거리는 지경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엇는데 괴산과 청주로 통한 길목이 되어 옛날부터 주막이 있었으나 도로확장으로 옛날 마을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김의신과 관련된 유적으로 경애정(鏡涯亭)을 들수가 있다.경애정은 청천면 지경리 신대마을의 동구 대로(大路)에서 약 100m 지점에 있다. 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사천현감(泗川縣監)이 된 김의신(金義臣)이 조선 정조 7년에 건립하여 향당청소년(鄕..
사리면 화산리에 있는 성암선생의 비석입니다. 성암선생은 김해인으로서 성은 김이며 이름은 문배이고 호는 성암이다.단기 4234년(서기 190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시절 일제로 부터 나라를 되찾기위해 신익희 선생등과 구국운동에 힘썼으며 광복이후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노력하는 등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다 성암선생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기리고져 1978년 비석을 세워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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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씨(羅氏)는 중국 백익(佰益)의 후예로 주대(周代)에 대라씨(大羅氏)로 나국(羅國)에 봉해져 나씨가 되었고, 그 뒤 한(漢)나라 초에 예장으로 옮겨져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었다. 문헌을 종합하면 시조 나부(羅富)가 봉명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미처 돌아가지 못한 사이에 송나라가 멸망하니 발라현(發羅縣)[지금의 나주]에 정착하고, 고려조에 출사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하여 후손들이 나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