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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452)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성면 도장리 마장골에 있는 옥천인 육항의 단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통의대부행공주목사옥천육공항지단(通議大夫行公州牧使沃川陸公沆之壇)이라고 적혀있으며 무덤과 석물은 후대에 후보되었습니다. 육항은 목사공파로서 고려시대에 공주목사를 지낸 인물입니다.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하였습니다
청성면 도장리 마장부락에 있는 옥천인 육항의 신도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통의대부행공주목사옥천육공항지신도비(通議大夫行公州牧使沃川 陸公沆之神道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신도비 뒷쪽으로는 옥천육씨 목사공파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육항은 고려시대 공양왕 때 공주목사를 거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하였습니다.
동이면 금암3리 용곡에 있는 돌탑입니다. 원추형으로 돌려 쌓았으며 가운데는 괴석이 놓여있습니다. 마을의 안녕과 함께 병이나 여러가지 해(害)가 되는것으로 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함 같습니다. 마을 앞 공터를 포장하며 위치가 이동 된 듯 합니다.
동이면 금암리에 있는 옥천전씨세거지비와 함께 있는 인봉 전승업선생의 추모비입니다. 전승업(全承業, 1547 명종 2~1596 선조 29)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며 의병활동을 하였다. 옥천전씨는 옥천의 유력한 성씨 중 하나로 고려 말부터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전숙全淑이 판도판서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동이면東 二面 적하리(赤下里, 지시래)에 은거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전팽령의 손자인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열사 700명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이고,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곽씨 모친 하에 1547년(명종 2)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디 과거를 보는데 ..
안내면 답양리에 위치한 가산사의 입구에 있는 돌탑입니다. 주위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아 놓았습니다. 풍수 지리적으로는 마을의 수구막이, 비보(裨補)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일컬어진다. 탑의 명칭은 탑, 조탑, 조산, 돌산, 토담, 수구막이, 거리제, 거리제 잡숫는 탑, 거리제 탑, 거리탑, 독닥거리, 정탑 등으로 불리는데, 각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성(性)[할아버지 탑, 할머니 탑, 남자 탑, 여자 탑, 내외 탑], 위치[바깥 탑, 안탑], 규모[큰탑, 작은 탑] 등에 따라 불리어지기도 하며, 축문에는 영탑지신(靈搭之神)으로 표현되고 있다. 탑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기단부, 탑 본체, 탑 윗돌, 내장물 등 네 요소로 구성되며, 돌탑의 형태는 돌을 수북하게 쌓은 누석형, 위아래를 둥글게 쌓은 원통형..
옥천읍 서대리 솔고개에 자리하고 있는 여흥인 민진강의 충효문과 묘소입니다. 묘소에는 비석과 문인석 그리고 망주석과 상석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는 사정士正, 호는 애일당愛日堂,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할아버지는 민광경閔光炅, 아버지는 민덕중閔德重이며 어머니는 성하적成夏績의 딸 창녕성씨昌寧成氏이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어릴 적부터 천성이 어질고 검소하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상제 노릇을 마치 어른과 같이 하였으며, 끝날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의 명에 따라 우암 송시열 문하 에서 수업하였으며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 두었다가 늦게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1720 년(숙종 36)에 의금부도사義禁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