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 1 | 2 | 3 | ||||
| 4 | 5 | 6 | 7 | 8 | 9 | 10 |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공산성 선정비
- 사인암
- 충북나그네
- 청풍문화재단지
- 효자문
- 티스토리챌린지
- 밀양박씨
- 공주박물관
- 법주사
- 오블완
- 경주김씨
- 문의문화재단지
- 외사리 당간지주
- 화양구곡
- 청주박물관
- 곡산연씨
- 선돌
- 부도
- 각연사
- 상당산성
- 단지주혈
- 부여박물관
- 충북의 문화재
- 한독의약박물관
- 국립청주박물관
- 문경새재
- 보성오씨
- 충주박물관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효자각
- Today
- Total
목록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27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에 자리하고 있는 모암공 강릉인 김덕숭의 신도비입니다. 한쪽으로는 예전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번에 후손들에 의해서 새로운 신도비를 만들었습니다.옆에는 신도비를 만들며 물질적으로 헌신한 종중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오석도 일기 세워져 있습니다. 문백면 평산리 김덕숭묘지(文白面 平山里 金德崇墓地) 문백면 평산리 김덕숭묘지(文白面 平山里 金德崇墓地)김덕숭의 효행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효행으로 1448년(세종 30) 명정되었고, 1633년(인조 11)에 이월면 사곡리 사지 마을에 효자문이 세워졌다. 김덕숭은 부모를 공양하는데 정성을 다king6113.tistory.com 이월면 사곡리 김덕숭효자문(梨月面 沙谷里 金德崇孝子門) 이월면 사곡리 김덕숭효자문(梨月面 沙..
문백면 평산리에 자리한 김귀성의 묘 밑에 있는 김귀성의 신도비입니다.김귀성은 강릉인 출천지효자인 김덕숭의 장자로 김덕숭의 묘지밑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신도비 전면에는 통정대부참의행통훈대부서부령강릉김공귀성지묘( 通政大夫參議行通訓大夫西部令江陵金公貴誠之墓)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른면에는 김귀성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월면 사곡리에 있는 조선중기의 효자 이집(李輯)의 묘소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 망주석을 갖추었으며, 봉분 왼쪽에 대형 묘갈을 세웠다.이집의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부모가 병으로 누워 있으면 옷을 벗지 않고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대변을 맛보아 병을 짐작하고 밤에는 밖에 나가 하늘에 기도하였다고 한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3년상을 치르면서 날마다 죽만 먹고 슬프게 哭하였다고 한다. 1717년(숙종43)군내 유림들의 천거로 3년 뒤인 1720년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으며, 1725년(영조1)에 효자 정문을 세우게 하였다.이집 묘갈은 방형대좌 위에 높이 143cm, 너비 61cm, 두께 27cm의 오석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얹었는데, 가첨석의 상단부에 여러 마리..
이경선은 1598(선조33)~1636(인조14)조선 중기 의병장입니다. 이경선(李慶善)은 경주인이며 이시발(李時發)의 아들로 1611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에서 출생하였다.그는 23세 때 과거에 급제한 천재로서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남포현감(藍浦縣監-현감은 지금의 군수)으로 있었을 때다.1636년 12월 14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적병이 서울에 침입하였다. 당시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파천(播遷)하셨다. 이 때 이경선(李慶善)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근왕병(勤王兵-의병과 같은 군사) 2,432명을 인솔하고, 밤길을 걸으면서 수원산성까지 갔다. 그 곳에서 3일 동안 머물면서 남한산성의 소식을 듣고 있다가 다시 수원 만의산(万義山) 아래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김덕숭의 효행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효행으로 1448년(세종 30) 명정되었고, 1633년(인조 11)에 이월면 사곡리 사지 마을에 효자문이 세워졌다. 김덕숭은 부모를 공양하는데 정성을 다해 세종 행차 때 그 효행 사실을 듣고 술과 고기를 내리고, 감사를 통해 백미를 내리도록 하였다. 그의 사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하고 어제시를 3수 내렸다.그의 효행 사실은 『동국신속사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에 실려있다.김덕숭의 묘소는 문백면 평산리에 있다. 묘소 입구에는 1928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이월면 사곡리 김덕숭효자문(梨月面 沙谷里 金德崇孝子門) 이월면 사곡리 김덕숭효자문(梨月面 沙谷里 金德崇孝子門)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미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는 강릉인 김덕숭의 효자문입니다.효자문 ..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미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는 강릉인 김덕숭의 효자문입니다.효자문 옆에는 김덕숭의 아버지인 김천익(金天益)의 비석이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의 효자 김덕숭(金德崇, 1373∼144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633년(인조 11)에 세운 효자각이다.세종이 눈병 치료를 위해 초정에 들렸을 때, 그의 효행을 듣고 충청감사를 통해 백미(白米) 10석(石)을 내렸다. 이에 김덕숭이 아버지를 모시고 세종을 찾아 인사를 드렸는데 세종은 누가 아버지이고 누가 아들인지 몰랐다고 한다. 1448년(세종 30)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이조참의에 증직(贈職)하고 어제시(御製詩) 3수를 내리면서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그의 효행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려있다. 김덕숭은 대흥군수를 버리고 고향으..
